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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출처 http://chripol.net/index.php?mid=religio...t_srl=1469


해방 정국과 기독교 건국 운동(하)

4. 기독교 좌파의 신탁통치 지지
해방부터 6·25 한국 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북한의 혁명단계에 따르면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수행·완성되고,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였다. 1946년 2월 활동을 시작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3월부터 토지개혁, 주요 산업시설의 국유화, 일본인 및 친일파 소유자산의 국유화 조치를 통해 반제반봉건 혁명을 진척시켰다. 그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정식 출범하면서 북한은 반제반봉건 혁명기로부터 사회주의적 생산과 소유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기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 시기에 남한에서도 북한의 건국 노선에 따라 공동소유와 공동생산의 공산주의가 더 훌륭한 체제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보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중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이 우월한 정치체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계급독재와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북한을 지지하거나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월북하였다. 교회 안에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와 인사들도 있었다.

북한에서 반제반봉건 혁명기로부터 사회주의 혁명기로 접어든 시기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그간의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중단하고 공산권 봉쇄정책으로 전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전개될 때 한반도는 그 냉전의 격전지였다. 이 시기에 기독교 우파에서는 월남한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조직되고(1946. 11. 30), 반공이념의 산실이었던 영락교회 학생회도 조직되었다.23)

이 무렵 좌익 진영에 합류한 개신교 세력은 1947년 2월 24일 결성된 기독교민주동맹이 유일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중심이 된 이 단체는 기독교 단체임에도 다른 종교 건물인 시천교 교당에서 결성식을 치러야 했을 뿐 아니라, 결성식장을 교회 청년들과 우익단체 청년들이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성식 장소를 습격하여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을 방해한 우익 청년단체 대표는 “이 대회는 기독교인이 모인 회가 아니고 모략적인 대회이니 이 사실을 자백하는 동시에 민중 앞에 사과”할 것을 김창준과 허헌에게 요구하였다.24)

기독교민주동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받아들여 정치적 좌파가 된 대표적인 사례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이 대표를 맡고 있었다. 그는 해방 후 좌우합작에 노력하던 중 10·1 대구사건을 겪으며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익계 통일전선 조직인 민족주의민주전선에 참여한 인물이었다.25) 그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겸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2월에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출범시키면서 교계의 좌익 세력을 대표했다.

김창준은 해방 후 국가재건 활동에 깊이 참여했으나 미 군정과 단정을 반대하며 통일된 국가재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남한 교회의 이단아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좌익 쪽에서는 그 동맹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사명인 진정한 인류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민주건국에 몸을 던지는 기독교의 토대가 되려고 반그리스도교적 반민주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투쟁을 개시할 것을 선언하였다”고 평가하였는데,26) 기독교민주동맹의 “민주건국”의 성격은 기독교민주동맹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선언은 서두에서 친일, 반민족적 교회 지도자들을 규탄한 다음, 신탁통치에 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며, “인민적 민주주의 건설”에의 참여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임을 강조하였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정신에서 살고 또 살라는 모든 신도는 당연히 총궐기하여 옳은 노선을 걸어야겠다. 관념적인 완고한 주관은 결코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배외도 아니요 사대주의도 아닌 상호평등적인 민주주의 연합국과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우리나라의 완전 민주독립을 기하기 위하여 국제헌장으로서 보장된 국제평화의 노선인 막부 삼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 임시정부 독립에 협력하자. 이에서만이 우리 동포가 미증유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학정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것도 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27)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되기 직전부터 김창준은 삼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이 조국독립을 위하여 옳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런 입장이 기독교민주동맹 선언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김창준에 의하면 참 애국은 조국애라는 미명을 팔아 국민 감정을 흥분시키고 배타주의를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어가는 인민에게 밥을 주고 착취당하는 형제에게 해방을 주며 유린당한 인권을 회복하여 주는 것이며 독립 쟁취에 가장 빠른 길은 막부 삼상 결정 지지에 있는 것이었다.28) 이처럼 김창준은 좌익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고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함으로써 근로인민대중에 기초한 국가건설을 추진하고자 했다. 김창준은 이것을 십자가 사랑의 구체화이며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 실현으로 보았다.

그후 김창준은 1948년 4월 기독교민주동맹 대표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차 평양에 간 후 김창준은 평양에 남아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참여하였다. 그가 결성한 기독교민주동맹은 대한민국의 수립 이후 지하 활동을 계속하다 1949년 10월 정부의 등록취소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29)

5. 기독교 국가의 실험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의 국교 가능성 또는 국가의 정신적 토대로서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이미 1900년을 전후로 한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기독 청년들로부터 나왔다. 1890년대 후반 배재학당 학생들은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 같은 주제를 토론했으며, 1900년대 초 이승만 같은 기독 청년은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기독교에 “대한 장래의 기초”를 두고자 했다.30)

이승만은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선교사들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세계를 구한다고 말하는 것이 듣기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31) 이런 희생정신을 향후 한국의 대한 장래의 기초로 삼고자 했다. 그 후 일제시기에도 기독교 국가의 비전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 국가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 정국 시기였다. 이 시기에 38선 이남에서는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교회나 기독교인 정치가들로부터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기독교인 정치인들의 기독교적 국가건설론은 1945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남부대회 주최로 정동감리교회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에서 나왔다. 김구는 경찰서 열 곳을 세우기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자며 강한 나라를 세우려면 “성서 위에” 세울 것을 호소했다. 김규식도 불가침의 강국을 세우려면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세울 것을 강조했다. 이승만 역시 이제 신국가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면서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하였다. 그들 각자가 기독교인 또는 그 동정자임을 고백하면서 모두 기독교 정신이 건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32)

이처럼 해방 직후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건국의 기초로 보았으나 이를 실천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1948년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기독교적 국가 의전, 국가 제도가 등장했으며 정부부처에 기독교인이 중용되었다.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비전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것을 가장 빨리 간파한 사람은 한국 교회의 진로에 예민했던 김인서였다.

이미 그는 1952년 3월 “이 대통령의 건국 대업”이라는 글에서 이승만의 기독교적 건국이념이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이 실천하고 있음은 물론 정치면에서도 실시하고 있다”고 갈파하고 있었다.

감옥 전도제, 종군 전도제도, 국기 주목례가 그것이었다.33) 대한민국 정부 초기부터 기독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새 국가의 의전과 제도, 사회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것을 보고 “백만 명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도처에서―정부에서, 국회에서, 나라 전체에서 감지된다”라는 말로 표현했다.34) 1951년 12월 그가 한 말이다. 우리나라가 불교 국가였고, 유교 국가이었던 시기가 있었듯이 기독교 국가의 실험은 이렇게 이승만 정부하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기독교 전래 불과 60여 년만의 일이었다.

기독교적 건국론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도 공공연히 거론되었다.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 국가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그 대신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겠고” 특히 미국처럼 기독교적 이상에 바탕을 두고 건국되기를 염원하였다. 한경직에게 미국은 “건국 이래 오늘날까지 세계에 제일 [많이] 축복받은 평화의 나라”였다.35)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기독교적 정신에 의한 국가 건설은 한경직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도 불교와 유교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기독교를 건국의 정신적 기초로 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독교는 이미 서구국가들에서 실험 성공한 것이므로 국민의 정신적 기반으로 기독교를 선택하는 데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36)

기독교적 건국론은 설교나 강연 외에도 해방 정국에서 결성된 기독교 단체들의 강령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주제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기독교신민회,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기독교민주동맹, 그리스도교연맹은 모두 교회 재건과 함께 국가재건을 위한 활동을 내세우고 있었다. 기독교신민회가 “우리 교회가 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국가 정립에 구현, 체득할까?”라는 동기에서 태동했다면, 그리스도교연맹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기독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강령으로 삼았다.37) 1947년 2월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했던 김창준 목사조차도 1946년 1월 국제교회협회(International Cultural Association)를 만들 때 우리나라가 “천부의 독특한 은혜”로 연합군을 통하여 해방을 받았으므로 건국의 기초가 천부의 은혜를 감사하는 토대 위에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38)

교회가 기독교적 가치에 토대를 둔 건국을 주장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과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이라는 인식, 해방 후 입국한 정치 지도자들(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기독교적 배경, 건국의 도덕적 기반으로서 구미제국에서의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39) 해방 후 한층 제고된 기독교의 위상과 교회의 인적 자원, 교회와 정치 관계의 불가분리에 대한 이해,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 미군정, 해방 정국의 국가재건 분위기 등은 교회로 하여금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해주는 주변 환경으로 작용했다.

6. 결론

지금까지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 정국에서 한국 교회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어떻게 참여했으며 어떤 정신적 토대를 가진 국가를 선호했는지를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부터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의 불가분리 관계를 강조하면서 교회의 새로운 국가 건설 참여를 당연시하였다. 해방 직후 새로 조직된 기독교 단체들 역시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국가 재건 참여를 강령에 제시하였다. 이처럼 교회 및 기독교 단체의 건국운동 참여가 당연시되고 확산되어 갔으나 기독교의 건국운동 방향은 동일하지 않았다. 기독교 건국운동은 세 방향에서 전개되었는데, 남북협상 노선을 따르는 중도파,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따르는 소수의 좌파, 그리고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한 우파가 그것이다. 세 가지 노선들 중에서 한국 교회 대다수가 추종한 노선은 우파였다.

먼저 1945년 말부터 전개된 신탁통치에 대한 초기의 찬반 국면에서 남한교회를 대변하는 조선기독교남부대회와 기독신민회, 독립촉성기독교중앙회 등은 4개국의 신탁통치를 명백히 반대하였다.

1946-1947년 사이에 신탁통치 찬반과 좌우합작운동 찬반의 중첩 국면에서 한국 교회의 압도적 다수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반대 진영으로 합류했다. 김규식이 회장이던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는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기독신민회는 김구와 한독당의 기독교계 지지기반으로 기독교신민회 간부 중 일부는 한독당에 참여했다. 기독신민회는 제2차 남북협상을 실천하기 위해 통일독립촉진회를 발족하자 여기에 참여했다.

단정과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 국면에 이르자 기독교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정 노선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이때까지는 중도파나 좌파의 교회 내 입지는 거의 없어졌다. 기독교민주동맹만이 신탁통치를 지지하고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건설 노선을 옹호했다.

결국 해방 정국에서 교회는 반탁 및 단정 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획득과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의 신탁반대, 좌우합작 반대, 단정 지지는 천주교, 불교나 천도교 등과 비교해서도 훨씬 더 분명했다. 기독교는 이승만 중심의 국가건설을 지지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새 나라의 정신적 토대로 삼으려는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비전을 공유했다. 결국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는 이승만과 미국식 기독교 국가 건설에 매달리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건국운동 세력과 대화와 연계를 갖기가 어려웠다.

김 흥 수 (목원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전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

출처: 기독교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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