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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꾸가와 막부(에도 江戶, 1598-1867)시대 기독교 탄압 방법

1)테라우께 제도

테라우께(寺請) 제도는 외국인을 포함한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주민등록처럼 그들의 종교에 관계없이 반드시 어딘가의 절에 소속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 소속한 절에 의해 기독교도가 아니라는 증명을 받도록 한다. 따라서 사찰은 사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해나가게 했다. 한마디로 절을 중심으로 하여 도망갈 수 없도록 지역집단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일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불교 신자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를 사실상 국교화 시켰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300년간[도꾸가와 막부(에도 江戶, 1598-1867)]지속되었다. 그 결과 지금도 일본인은 반드시 어딘가의 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인에게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나의 집은 무슨 무슨 종(宗)에, 절은 어디에 있다'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일본인이 하고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일본 사람은 반드시 그 절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또 그 절에서 장사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조상숭배의 체질을 지녔던 일본인이 이것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지역과 절에 연결되게 되었다. 즉 이 제도를 이용해서 도꾸가와 막부는 우선 사람의 죽음을 쥐어잡았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 갓던 것이다. 일본인의 체질과 특징을 살린 최고의 신기한 방법이라고 밖에 표현 할 길이 없다. 이런 교묘한 방법에 어느 누가 저항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의 불교는 이것 때문에 완전히 장례식 종교로 전락한 채 본래적인 일반종교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일본 조상숭배의 세계 속으로 침몰해 버렸던 것이다. 현재 불교가 지닌 행사 가운데 불교의 독자적인 것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영안7년(1778년) 선조원 승조원에게 발행된 아래 신분증명서(사청)를 통해서 이 사청장 소지자가 법화종 법화사 소속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출처: http://www.hokkaido-esashi.jp/kankou/kitamaebune/03.htm ]



(2) 종문조사
  테라우께(寺請)제도와 함께 절에 소속해 있는 사람들의 신앙을 조사하기 위해 각 마을마다 종문조사를 실시하여 모든 사람들을 여기에 수록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행, 혼인, 이사, 취직 등을 할 때 이 증명서(寺請證文)가 필요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것에 의해 절은 출생과 혼인, 장례와 거주 라는 생활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절의 허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불교 신자가 되지 않으면 일본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도록 하였다. 일본에서의 절의 번영은 기독교 탄압에 대한 정책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은 처음부터 불교도가 아니었고, 이러한 방법들에 의해서 강제로 불교도로 만들어져 버린 셈이다. 테라우께(寺請)제도와 종문조사를 통해서 일본인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절에 집착했어야 했고, 또 자신들을 불교도라고 하는 이유를 알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런 조상에 대한 공양을 기초로 한 불교도 라고 하는 것과 자신이 조상 숭배자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사람들이 도꾸가와 시대 때 기독교 금지의 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던 이 제도에 자신들도 모르고 얽매여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3) 후미에
기독교를 탄압했던 세번째 방법은 후미애(踏繪)라는 것이다. 매년 한 번 마리아나 예수의 그림, 또는 그 상(像)을 사람들 앞에 내놓고 그것을 밟으면 살려주고, 밟지 않으면 기독교인이라 판단해서 적발하려는 의도로 만든 제도다(이것은 현재도 도쿄에 있는 上野미술관에 진열되어 있음).
  이 제도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기독교가 해금될 때까지[금교령은 1873년에 폐지된다]  약 300년간 매년 행하여졌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미에를 밟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서운 고문이 가해졌으며, 그렇게 해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경우에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도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 당시의 비극이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소설이나 영화로 발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엔도 슈사꾸(遠藤周作)의 ‘침묵’ 이라는 소설[아래 동영상을 보라]은 후미에의 상황이나 잔혹한 고문들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일본으로 밀항해 건너온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모진 고문과 박해를 견디지 못해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가 되어버린 선교사도 있었다.



(4)오인조 제도
이것은 일제시대 때 도나이구미(隣組, 이웃집과 한 조를 구성하는 것을 말함)와 비슷한 것으로 5인조 제도가 있다. 농민들은 다섯 가옥이 한 조가 되게 조직해서 세금이나 범죄 등의 감시와 기독교 적발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정말 가공할만한 제도였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썼던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심을 불러 일으키게 함으로써 교묘하게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다.
  도꾸가와 시대 300년간 지속되었던 것이었지만 아마 이 제도만큼 일본인의 마음을 깊숙히 지배하고, 상처를 주었던 제도는 없었을 것이다. 본래 쾌활했던 일본인의 성격을 뿌리에서부터 왜곡시켜 오늘의 일본인의 성격을 만들어 버렸다. 이 시대 이전의 일본인은 감정이 확실하고, 의외로 개방적이고, 단순소박한 성격이었다는 것이 남겨진 예술작품, 특히 시와 여러 문학 작품 속에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속과 겉이 다르다’ ‘진심과 거짓이 있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없다’ 라고 하는 표현들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렇듯 상호간의 감시제도는 일본인을 깊이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에도 나타나지 않는 대단히 알기 힘든 국민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는 일본인의 주된 성격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이 현재 자신들의 성격이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5)기리시단 유족조사
마지막으로 도꾸가와 막부는 기독교 금지령에 있어서 만약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본인 뿐만 아니라 친족까지 기리시단 계열이라고 단정하여 남자는 7대까지, 여자는 4대까지를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켜 특별 감시하에 두었던 것이다. 무라히찌부(村八分)라고 해서 장례식과 화재 이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교제하는 것이나 구조받는 일체를 금한다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다시말하면 사회로부터의 추방을 말한다. 타인과의 일체의 교류를 금지 당한 이 징벌은 사방이 바다에 싸여 이민족과 교류가 전혀없는 일본에 있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도 없는 공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공포나 증오심은 그야말로 일본인의 피가 되어 흘러서 새로운 체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기독교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이유없이 증오감을 느끼고, 소름끼치는 피해의식의 현상들은 일본에 아직도 많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거나 무시하고 오직 전도에만 몰두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실패가 뻔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유교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반기독교 교육이 행해진 것도 이유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도꾸가와 막부(에도 江戶, 1598-1867)] 300년간 행해졌던 기독교 박해의 내용이다. 이것은 아마 전세계를 통틀어도 이토록 철저하게 긴 탄압과 박해는 없었을 것이다. 또 이들의 제도에 의해 30 만 명이라는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했다는 것이다.
  요컨데 일본인의 성격이나 일본 기독교가 부흥되지 못한 이유로서 이러한 과거의 기독교 역사를 제쳐 놓고서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일본인마져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 하물며 선교사들이 이런 사실을 얼마 만큼 이해하고 사역에 임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애석하게도 대다수 선교사들이 일본인의 성격을 잘 포착하지 못한 채 마냥 두려워하기만 한다든지, 또 오직 믿음과 열심만 가지면 다 된다 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적이 궁금하다. 만약 선교사들이 일본선교를 그렇게 준비하고 임한다면, 일본선교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필자가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선교의 방법들을 안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기 방법대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결국 일본사람들은 거부하고 돌아서버릴 것이다.
  지금은 그로부터 아직 100 년 밖에 경과되지 않는 시점이다[금교령은 1873년에 폐지된다]. 한번 형성된 성격과 체질은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일본선교의 어려운 점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꿔말하면 일본만큼 기독교와 관계가 깊은 나라도 없고,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기독교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문화가 만들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일본선교의 비밀을 벗긴다, 테라다유이찌∙테라다리사 지음, 곽명옥 옮김, 1995년,157~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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