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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의 Mystic Art Story] 진화론과 접신론의 회화적 상상, 오딜롱 르동의 작품 세계


여기 비올레트 에망(Violette Heymann)이라는 한 소녀의 초상이 있다. 화려한 색채가 인상적인 이 그림은 초상화치고는 참 특이하다. 초상화 하면 모델이 화면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약간 각도를 튼 채 왼편을 응시하는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모델이 화면의 오른쪽에 치우친 모습으로 완전한 프로필(옆모습)로 묘사됐다. 게다가 소녀의 시선은 특정한 지점을 쳐다보는 게 아니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꽃처럼 생긴 형상들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점도 낯설다. 그 형상들은 소녀와 가까울수록 추상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대체 무엇을 묘사하고자 한 것일까.


‘비올레트 에망의 초상’, 1910년, 파스텔, 72×92cm, 클리블랜드 미술관



그림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이라는 작가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르동은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산지인 보르도의 메도크 근방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르동은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건축학교 진학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는 바람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장 레옹 제롬에게 잠시 배운 후 보르도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로돌프 브레스댕을 만난다. 르동은 상상의 세계를 즐겨 묘사한 브레스댕의 영향을 받는 한편 그로부터 드로잉과 판화 테크닉을 배우게 된다. 이후 그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저변에 자리한 신비한 세계를 묘사하기를 즐겼다. 그는 당시 문단을 풍미하던 상징주의 문학에 공감, 보들레르와 말라르메와 친교를 맺기도 했다. 그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위스망스가 자신의 소설 ‘거꾸로’에 르동의 작품을 언급하면서부터였다.

르동 이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여러 가지 과학적 성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우주 자연의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특히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환경이 변화했을 때 개체 간의 경쟁이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가운데 진화가 이뤄진다고 한 주장은 당대인들을 열광시켰다.

한편으로 과학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불신을 갖게 만들었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그 대안을 동양사상에서 구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불교가 그 유력한 대안으로 등장했고 지식인 사회에 바람을 일으켰다. 선한 업을 많이 쌓음으로써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서구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진화론’으로 비쳤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불교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적인 접신론(接神論·theosophy)을 결합시켰다. 접신론은 우주와 신,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연결됐다는 전제 아래 그 신비를 추적하려 한 사상으로, 특히 19세기 후반 헬레나 블라바츠키에 의해 유럽 사상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은 많건 적건 불교와 접신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르동의 작품은 그러한 시대의 정신적, 과학적 조류를 폭넓게 흡수해 자기 방식으로 소화한 상상의 산물이다. 르동은 만물의 미세한 부분에는 ‘신의 배아’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꽃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특히 식물 가지의 끄트머리는 신이 내리는 은총의 빛을 받아 그 배아가 꽃망울을 터트리게 되는 장소라고 여겼다. 그중에서도 눈은 영혼의 각성을 상징한다고 봤는데 르동의 초기 작품은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다. 


‘가면을 쓴 아네모네’, 수채, 24.5×175cm, 개인 소장



‘이상한 꽃’, 연대 미상, 목탄, 40.2×33cm, 시카고 예술원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이 식물의 끄트머리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얼굴이라든가 눈을 강조한 것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꽃에서 인간이 생겨나는 모습은 연꽃이 만물을 탄생시킨다는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을 연상시켜 흥미롭다. 한편 이 시기의 작품들은 검은색 목탄으로 그린 것이 많아 흑색시대라고 불린다.

르동의 작품은 1890년대에 들어와 면모를 확 바꾼다. 태초에 우주의 거대한 폭발인 ‘빅뱅’이 일어나 별들이 우주 공간을 메운 것과 마찬가지로 화면은 거대한 꽃다발이 폭발해 꽃으로 가득 메워진 것 같다. 흑백이 지배하던 화면도 현란한 색채감으로 보는 이를 매혹한다. 한편으로 꽃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는 모습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생물의 세계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당시 파스퇴르에 의해 이뤄진 미생물학의 발전과 신지학의 정신적 진화론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꽃-붉은 패널, 캔버스에 템페라’, 1906년, 159.5×113.5cm, 개인 소장



그러면 ‘비올레트 에망의 초상’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먼저 소녀의 주변에 퍼져 있는 꽃은 정신적 발달을 상징한다. 생명의 배아는 꽃을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자라난다는 불교적 세계관의 반영임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꽃과 인간은 서로 다른 종(種)인데 어떻게 사람으로의 진화가 가능할까. 그 해결의 열쇠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신지학이다. 우주 및 사람, 신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있으니 꽃에서 사람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은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르동의 초상화 중에서 이런 꽃의 무리는 여자와 아이의 초상에서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서구인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인종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의 반영이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있어 아이와 여성은 비이성적이며 감정을 억제할 줄 모르는 히스테리컬한 존재였다. 그들은 꽃망울이 개화하듯 정신적인 개화를 향해 나아가야 할 대상인 것이다. 


‘두 소녀’, 1909년, 파스텔



르동의 신비하면서도 때로는 괴기스런 그림은 바로 19세기 말 물질문명의 비대한 발전 속에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상적, 신앙적 비전이 부재했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던 유럽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고뇌가 투영된 것이다. ‘비올레트 에망의 초상’은 그런 시대적 고민이 종합된 르동 자신의 내밀한 시각적 비망록이었던 셈이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입력일시 : 2012-07-1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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