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뢰공장

02)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 박수웅, 정충제, 그리고 백준흠.

by anonymous posted Jun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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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1) 들어가기: 돌과 금
02) 정충재와, 그리고 백준흠과 김성태와 채상훈
03) 미하라 도시오와 최종욱: 어뢰공장과 보물.
04) 박수웅과 정충제
05) 백준흠
06) 판결문
07) 박수웅의 굴과 정충제의 수직구와 어뢰공장의 수평굴
08) 황금의 목격자들
09) 백준흠의 메일과 댓글
10) 재심을 청구하는 정충제
11) 백준흠, 노무현과 문제인.
12) 문현동 지하 어뢰공장의 땅 주인.
13) 문현동 지하 어뢰공장에 수장된 조선인 강제징용인 1000 여명의 유골.
14) 끝내기: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과 위장이슬람.



이 글은 2018년 5월 31일 정충제 선생이 태평 유투브 티브이와 행한, 부산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에 관한 인터뷰로 인하여 쓰여진 것이다.


'국내 유일의 탐사가 백준흠 씨' 라는 제목으로 2004년 2월 19일 중앙일보에 소개된 이경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백준흠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물찾기는 긴 승부입니다. 저 자신 3년 넘게 탐사를 했어도 아직 보물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저장 동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또 굴을 찾았다 해도 보물이 아니라 그저 병참 물자만 숨겨놓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금방이라도 보물이 나올 것처럼 떠들어대며 투자자를 모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 [출처: 중앙일보, week& cover story, 보물을 찾는 사람들, 클릭!] 오른쪽 사진은 정충제 씨의 '어뢰공장 수평굴'에서 나온 염주소금 포대 안의 돌들이다(출처: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50회 방송일: 2004.05.17(월), 클릭!)

'투자자들 모으러 다니는 사람들' 이라는 말을 했을 때 백준흠 씨는 그 누구보다 먼저 정충제 씨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충제 씨는 자신의 책, '실화 황금백합작전'(2010, 태웅출판사, 서울)에서 '2002년 3월'(위엣책, 103쪽, 119쪽)에 강남의 백준흠(명)의 사무실에서 백준흠과 함께 후에 금편이 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3열5단의 이등충(伊藤 忠)이 찍힌 '황색포대'들을 촬영된 '수평동굴내부' 영상에서 봤다고 주장한다: " 하진수(기)를 급히 불러서 그의 스타렉스 승합차로 (서울 강남) 신사동으로 달려가니 기다리고 있던 백준흠(명)이 그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 수평 동굴 내부에 대한 최초의 수중 촬영으로, 다이버 채상훈(민)이 지상에서 내려 보낸 수중 카메라 모니터에는 놀랄 만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 이윽고 김성태(준)이 흥분해서 말했던 황색 포대에 일본식 한자 '伊藤 忠(이토츄)' 석자가 선명하게 찍힌 채 나타났다. ...... 김성태(준)이 한쪽 구석으로 날 부르더니 오른 손 바닥을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형님, 놀라지 마이소. 굴속의 포대 안에 든 게 모두 금입니다. 금!' "(위엣책, 114~115). 위엣 우측 사진(위엣책 215쪽)은 백준흠이 지리산으로 납치됐을 때, 그의 '주머니'(위엣책, 214쪽)에서 툭 튀어나온 '금편 하나'이다.

02)정충재와, 그리고 백준흠과 김성태와 채상훈(목차 클릭!)
부산 남구 문현동 어뢰공장 동일한 수평굴에서 한 쪽에 의하면 돌 조각들이 나온 반면 한 쪽에 의하면 금편들이 나왔다. 더구나 모두 실증적인 사진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법원은 '2006년 2월 6일'(위엣책, 241쪽) 돌의 편에 선다. 금편은 허위날조라는 것이다. 최영 장군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겪언을 몸소 실천한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워'의 1심 판사 박종혁(236쪽)이었다. 그 결과 "피고인 정충제에게 징역3년"이 1심에서 선고 된다. '역시나 사기죄로 판단한 항소심 판결문을 받'(256쪽)아든 정충제는 상고하였으나 이번에는 그 상고가 '기각'(258쪽)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헌법재판관 7인에 의한 박근혜 대통령의 위헌파면과 같은 성질의 것, 즉 예정된, 의도적인 거짓 판결인가? 정충제는 다음과 같이 판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퍼부었다': "야! 도굴단보다 더 나쁜 너 같은 놈이 무슨 대한민국 판사야? 얼마나 받아 처 먹었어? 이 도둑놈의 새끼야!"(위엣책, 241쪽). 이러한 욕을 피의자에게 들어 처 먹은 판사는 박종혁으로서 정충제의 체포영장을 발부한 판사이기도 하다--정충제는 2005년 9월 6일 저녁 9시경 '사기와 무고 혐의로 긴급 체포'(위엣책, 231쪽)됐었다. 

왜 백준흠(명) 측은 정충재를 사기와 무고죄로 고소했는가? 그리고  쌍방 간의 고소 고발에도 경찰은 다급하게 왜 정충재 만을 긴급체포했는가? 이 보다 앞서, 정충재도 2004년 9월 도굴단 '일당 네명'(위엣책, 216쪽), 백준흠(명), 김성태(준), 채상훈(민), 김홍랑(련)을 고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경찰과 검찰이 백준흠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긴급 체포(緊急逮捕) 또는 무영장 체포(無令狀 逮捕, 영어: arrest without warrant)는 수사기관에게 현행범에 해당하지 않는 피의자에 대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긴급한 상황에서 영장없는 구속을 일시적으로 허용하는 제도"(위키페디아)가 아닌가? 정충제를 긴급체포할 수 밖에 없는 긴급한 상황이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도대체 백준흠은 누구이며, 정충제보다 '근 열 살이나 어린'(위엣책, 233쪽) 백준흠이 왜 정충제에 의해 '도굴단의 두목'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백준흠(명) 보다는 먼저 채상훈(인)과 김성태(준)가 거론되야 한다. 채상훈이 자신에게 소개해준 백준흠(명)을 김성태(준)가 정충제에게 소개 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준흠과 채상훈과 김성태는 실명이고 백준명과 채상인과 김성준은 책에 나오는 가명이다. 이 글에서는 가명이 실명 우측 괄호 안에, 때로는 가명이 실명 우측 괄호 안에 병기되기도 할 것이다.


부산 자갈치시장 신천지백화점 1층 '채상훈스쿠버다이빙센터'를 당시 운영하고 있었던 채상훈(인) 이라는 스킨스쿠버다이버가 김성태(준)를 통해 정충제에게 백준흠(명)을 소개했는데, 이 때부터 부산 문현동의 일제어뢰공장이 빛을 보기시작하는 동시에 김성태(준) 라는 배신의 칼날이 정충제의 등을 후비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자신에 의해 뚫린 수직굴이 '어뢰'(위엣책, 24쪽, 115쪽)들이 놓여있던 공간에 5단으로 쌓인, 이등충(이토 츄, 伊藤 忠)이라 찍혀진 '황색포대'(위엣책, 114쪽)에서 약 30센티미터 빗겨 관통했던 순간부터 정충제는 자신이그토록 믿었던 '유일한 심복'(위엣책, 71쪽) 김성태에게 배신 당한다. 김성태(준)가 백준흠을 '우리'(위엣책, 119쪽)로 칭하면서 정충제를 '사기꾼'(위엣책, 125쪽)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이 따랐던 정충제를 사깃꾼이라고 부른 반면에 백준흠(명)을 '우리'라고 했을까?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 나는 산청에서 서류를 준비하여 서울로 올라오며 고향의 아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니, 4억 원도 받고 현장 땅을 등기 이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서류를 넘겨주선 안된다는 당부를 듣고 그러마고 대답했다. 4월 5일 식목일 아침인데 이상 난동으로 그해따라 꽤 날씨가 더웠던 걸 기억한다. 백준명(흠)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법인 서류 준비는 다해 오셨는지요.' '예,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납시다.' 약속장소를 서울시청 후원으로 잡았다. 덥기도 하거니와 고양에서 나가기엔 교통도 편리하고 휴일이라서 그곳이 한가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이 미리와 기다리고 있었다. 앉자마자 서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서류들을 보여 주기만 하고 약속한 4억원과 현장 땅이 이전되면 주겠다고 했더니, 화가 났는지 파충류처럼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얼굴까지 벌겋게 변했다. 나중엔 눈까지 충혈되어 입을 꽉 다물더니 어디론가 다급하게 휴대폰 번호를 눌러댔다.

2분도 채 안되어 진초록 스타렉스 승합차가 후원쪽으로 달려오더니 급정거했다. 낯익은 차였다. 마포에서 '지리산 흑돼지' 식당을 운영하는 김성준(태)의 친구 하진기의 차로, 문이 열리자 김성준(태), 채상호(민), 돌팔이의사 조읍규(규만), 하진수(기)가 차례로 내렸다.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백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갑자기 김성준(태)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 사기꾼아! 빨리 차에 타라. 오늘은 결판을 내자!'하며 차 속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 했다. 사기꾼이라니?? 김성준(태)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대로 끌려나가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서 그를 힘껏 밀쳐내고 무조건 시청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시에 '사람살려!' 라고 고함치며 큰길을 가로질러서 무교동 입구로 뛰었다. 근처 시청 화단에서 나무를 심던 인부들이 무심하게 일손을 멈추고 바라볼 뿐 도와주는 사람하나 없었다. 영락없이 진짜 사기꾼이 도망치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골목 안에 을지로1가 파출소가 보여서 무조건 뛰어들었다. 일당은 파출소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자기들이 사기를 당한 피해자라며 사기꾼을 잡아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경찰이 난처한 표정으로 저희들끼리 모여서 잠시 의논하더니, 김성준(태)에게 '저분은 현행범이 아니니 파출소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며 원만하게 대화로 풀라고 종용했다.

파출소 옆에 붙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식탁을 가운데로 둘러 앉아 한마디씩 했다. 요점은 지분 배정을 확실히 하자는 얘기였다. 김성준(태)의 선동으로 다수가 나를 협박해서 자기들 몫을 확실하게 챙기고, 여차하면 사기죄로 몰아가자는 작전인 듯했다. 백지가 몇 장 펼쳐지고 관련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쓰였다. 거기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지 못하면 몫도 없는 것이니 모두가 진지했다. 김성준(태)가 주선하여 문현동에 투자한 사람들과 기타 수직구를 뚫을 때까지 도움을 준 인사들이 모두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20%를 자신의 몫으로 고수했다. 그 다음은 하진기와 조규만, 채상민(훈) 순으로 자기 몫을 주장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딱 맞는 표현이었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이 따로 없이 떠들석한 게 정말 가소롭고 가관이었는데, 김성준(태)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체를 100으로 보고, 그 반을 떼어 무슨 공익재단을 만든다는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 아니오? 지분의 반을 그런 명분으로 뒤에다 꼬불쳐 두고 혼자서 독식을 하겠다는 심보에 누가 속아 넘어 가겠소? 그러니 내 말은 공익 재단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고 앗사리 100을 갖고 나누잔 말이오. 내가 아니면 지하 수평굴을 어찌 찾아낼 수 있었겠소.' 본심이 그대로 나타났다."(125~127쪽)


김성태(준) 자신이 아니면 부산 문현동 지하 수평굴을 찾아 낼 수 없었다는 발언이다. 정충제의 그 책과 공개된 영상들을 보고 판단건데, 김성태(준)가 없었으면 채상훈(인)도, 백준흠(명)도 어뢰공장의 그 수평굴과 관련하여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김성태(준)는 정충제에 픽업되어 비로서 그 수평굴과 관계를 맺게 됐으므로 정충제가 없었다면 김성태(준)도 없었다. 물론 정충제 역시 '폭1.5미터, 길이1.8미터 (굴)의 수직구'(34쪽)로 오느락내리락하며 지도에 표시된 지하 어뢰공장을 향해 굴진해 가다 중지도 포기하고 있던 '박수웅'(38쪽)에게 '발굴 경비 1억원을 투자하면 10% 지분을 받기로'(41쪽) '1992년 10월 어느날'(38쪽) 약속하고 1억원을 박수웅의 통장에 '입금'(44쪽)한 다음에야 비로서 '문현동 굴착현장'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2억원이 박수웅에게 정충제에 의해 더 건네진다. '하루 아홉 시간 작업해 봐야 겨우 10cm 정도 밖에'(34쪽)굴진할 수 없어 '1999년 3월 5일 남구청으로부터 매장물발굴승인기간만료에따른통지 라는 원상복구명령을 받게'(46쪽)되기까지 '박수웅이 전부 파 들어간 길이는 22m에 불과했다.'(46쪽). 정충제는 '박수웅이 자기 경비로 수직굴을 다 메웠'(46쪽)으며 굴진작업을 하는 '세 명의 인부들도 ... 내 쪽으로 합류하게 되었다'(47쪽)고 주장한다.


03)미하라 도시오와 최종욱: 어뢰공장과 보물.(목차 클릭!)
이렇게 해서, '1980년대 후반 어느날 저녁 ......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17쪽) 방문한 노신사 최종욱(야마시로 마사노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네듣고 땅굴을 파들어갔던 박수웅의 몫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 하지만 야마시로 상(최종욱 선생), 명심하게. 자네가 성공하여 부자가 되면, 자네가 찾아낸 보물 속엔 나 미하라 도시오의 몫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말을 마친 미하라 중좌는 펼쳐 둔 군사지도의 한 곳을 뾰족한 만년필 끝으로 가리켰다고 했다. '여기를 잘 기억해두게. 이 지하에 우리 해군에서 사용하던 어뢰 공장이 있어. 입구는 좁지만 안에 들어가면 자동차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비행기 공습도 하기 어려운 곳이야. 내가 말한 '긴노 유리'의 수확물들은 모조리 이 속에 들어갔어. 지상 한 쪽에는 남방에서 싣고 온 원목더미가 쌓여있을 거야. 그리고 동쪽은 작고 야트막한 산이야. 원목이 쌓여있는 현장은 산을 절개한 평지라서 절벽 밑이야. 그 절벽의 반대쪽은 바다로 군용부두가 있지. 본국에서 반도로 오는 군용선은 모두 이곳에 정박한다네. 그래서 군용부두 바로 옆의 지명이 '후나 와다시바'라고 하네. 이 지명을 잊지 말게. 그리고 현장에서 가까운 이곳을 좀 봐. 부산에서 가장 큰 개천이 흘러 들어가서 바다와 만나는 곳이야 여기와 잇닿아 있는 이 지점이 '사게노 세이쇼바'야. 그 건너편에 미곡을 처리하는 가장 큰 도정 공장이 있어. 따라서 이 일대는 군수 시설만 모여 있는 민간인 통제구역인 셈이야(21-22쪽) .... 미하라 중좌는 다시 원목더미가 표시된 곳을 가리켰다. '이 아래쪽 지하가 바로 어뢰 공장이야. 잠수함에서 쏘는 어뢰 알지? 이 공장에 있던 어뢰는 다 실어 내서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 빈 공간에다 중국에서 싣고 간 보물들을 대신 숨겨 놓은거야." ...... 실로 엄청난 비밀과 함께 미하라가 그린 보물을 숨긴 약도는 최종욱의 손에 넘겨졌다(24쪽)"--아래 그림은 23쪽에 나온다.



백준흠 씨가 그렸다고 알려진 어뢰공장 내부도 ↑


그 후 최종욱(야마시로 나사노부)은 "82세 되던 해인 1994년 2월, 박수웅의 안내를 받아 부산에 내려와서 1박을 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수직굴을 파던 문현동의 현장 부근을 건강한 모습으로 방문하기도 했으나, 끝내 보물은 보지 못한 채 2005년 93세의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25쪽)



04)박수웅과 정충제(목차 클릭!)
따라서, 문현동 어뢰공장 금괴 이야기는 중국 남경 영사관에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정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미하라도시오 중좌가 1945년 8월 15일 오전에 조선인 최종욱(야마시로 마사노부)에게 그 영사관 '현관'(19쪽)에서 최초로 전해지고, 이것을 최종욱이 1980년 후반 어느날 저녁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17쪽) 슈퍼마켓에 찾아 와, 박정희 대통령 전용이발사였던 박수웅에게 알려줬고, 그리고 박수웅(아래 사진, 출처: 조선pub 클릭!)은 1992년 10월 어느 날 문현동에 찾아 온 정충제에게 어뢰공장 이야기를 해 주므로서, 어뢰공장 금도굴사건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월간조선 2004년 7월에 실린 이은미 자유기고가의 집중인터뷰에 따르면 보물에 관하여 박수웅씨는 다음과 같은 회한에 서린 말을 한다: 이게 다 운명이지요. 청와대만 안 들어갔으면 보물이 있다는 정보도 몰랐을 테고,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자식들하고 아내에게 미안하지요. 보물 찾으러 돌아다니니 집안 살림은 아내가 책임졌』(출처 진짜 '효자동 이발사' 박수웅 씨, 클릭!). 2004년이면 정충제씨의 수직구가 문현동 어뢰공장의 수평굴을 관통한 후 2년 여가 지난, 그리고 정충제씨에 따르면 2018년 지금도 금도굴이 행해지고 있을 것이지만 금도굴도 거의 완료됐을 시점이라는 것에 유의하자. 

    '부산 남구 문현4동 1210번지'(출처 클릭!)의 일대에 매장되어 있는 '적기만赤岐灣' 보물지도를 1975년경 공군 대령 출신인 김성태(1977년 작고)씨와 부산 동아대학의 지질학과 구준택(1984년 작고)교수가 친지의 소개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건네자 '1988년'에 박수웅씨는 보물을 찾아 나선다. 지도 입수 경위가 정충제 씨의 증언과는 다르지만, 이것은 현재의 내가 검증할 수 있는 바의 것이 아니므로, 단지 다르다는 것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월간조선 집중인터뷰에 나온 보물발굴 시점이 1988년 이라는 사실은 정충제 씨의 '실화 황금백합작전'의 책에 '그(박수웅)는 1989년부터 일꾼들을 데리고 수직굴을 파다가 돈이 떨어져서 새로운 물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39쪽)에서 언급된 년도와 '일치'하고 그리고 정충제의 그 책은 '실화'를 기록해놓은 다큐멘타리의 성격을 띠므로, 정충제의 증언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그렇다고 다른 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박수웅과 함께 고생을 하며 문현동 현장을 지켰던 정충제가 박수웅과 결별한 것은 진돗개 한 마리와 땅굴의 굴진 방향 때문이었다. 정충제의 설명을 들어보자:


" 당시 나는 산청의 산속에서 평소 내 생명을 지켜 주는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진돗개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암컷 어미와 새끼 다섯 마리가 있었는데 진돗개 중에서도 제일 똑똑한 백구였다. 박수웅이 그 사실을 알고, 일본 자객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며 개가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보물이 발굴될 때까지 현장에 파견시킨다는 생각으로 그중에서 가장 똘똘한 개 한 마리를 데려다 주고 왔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현장에 그 개가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하여 물어보니, 박수웅은  백구가 산으로 도망갔다며 안색도 안 바꾸고 시치미를 뗐다. 그런데 몇 달 후, 같이 일하던 인부들로부터 우연히 들은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들로부터 박수웅이 진돗개를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그가 '개만도 못한 놈'으로 생각되었다. 개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더러 종교적으로 불교를 믿고 있었기에 박수웅의 행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또 용서할 수도 없었다. 주인의 생명을 지켜 주는 어린 개를 삶아 먹는 그런 의식 상태를 가진 인물과 어찌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를 품고 즉시 결별하고 말았다.

또 하나는 박수웅이 예상과 달리 굴착 성과가 없자 굴착 방향을 반대로 틀어서 남의 땅(한진중공업소유)을 파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이다. 나는 도합 세번 정도 굴속으로 내려가 직접 살펴 보았다. 보물을 발굴하더라도 문제가 되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같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 명의 인부들도 그런 박수웅의 무리수를 알고 자연히 내 쪽으로 합류하게 되었다."(47쪽)


박수웅과 '결별'(47쪽)한 정충제는 1993년 어느 날 '사천에서 김포행 비행기에 동승하여 옆에'(48쪽) 앉은 경남신문 장순호 국장에게 문현동 프로젝트 얘기를 하는 가운데 장순호를 그 일에 끌어 들이게 되고 그리고 장순호로부터 문제의 그 김성태(준)을 소개받아 비로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김성태(준)를 정충제는 우연히 '부산 조방 앞의 금은방으로 번잡한 골목길을 지나다가'(68쪽) 만나게 되고, 그리고 2002년 3월2일 정충제의 수직굴이 어뢰공장의 수평굴 관통 후에 그 수평굴에 들어 갈 스쿠버다이버로 채상훈(민, 110쪽)을 김성태(준)가 끌어들이며, 채상훈(민)이 연결해 준 문제의 그 '도굴단 두목'인 백준흠(명, 111쪽)을 김성태(준)가 정충제에게 소개한다. 정충제와 결별한 박수웅은 "수직굴이 뚫릴 때까지 수년 동안 문현동 현장 부근을 떠나지 않았고, 늘 주변을 맴돌며 집착했다."(89쪽).
    어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건가만은 미국 CIA 요원이며 '미 국방부 동 아시아 태평양 담당 부 차관보'(65쪽)인 롤리스와 함께 일을 추진하는 정충제의 위세에 눌려 문현동 현장 주변을 박수웅은 아픈 가슴으로 맴 돌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박수웅 때문에 정충제는 수직구가 뚫리는 문현동 현장에 있을 수 없었는데, 박수웅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현장 지휘는 김성준이 전부 책임지고, 박주영 회장의 대리인으로는 AS센터 책임자인 강상호가 참석하였으며 나[정충제]는 가까운 5분 거리의 인근에서 수시로 전화를 통해 진행상황을 보고 받았다. 왜냐하면 만약 박수웅이 내가 주도로 굴착을 하는 줄 알면 어떤 훼방을 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는 박수웅은 김성준을 잘 몰랐고 그가 나의 일을 돕고 있는 관계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102쪽)


05)백준흠(목차 클릭!)
문현동 어뢰공장 수평굴 관통후에 비로서 합류할 수 있었던 백준흠(명)은 정충제를 제치고 이제 주도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아간다. 스킨수쿠버다이버 채상호(민)가 수평굴에 들어가기 전에 촬영한 '수평 동굴 내부에 대한 최초의 수중 촬영'(114쪽) 녹화 테이프를 정충제보다 먼저 입수 소유한 것도 백준흠(명)이요, 이 사실을 안 정충제가 전화하자 자기 사무실로 보러 오라고 한 자도 백준흠(명)이기 때문이다. 채상호(민)가 자신에게 연결시켜준 백준흠(명)을 김성태(준)가 정충제에게 전화로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40대 젊은 사람인데 어마어마한 실력자입니다. 좌우간 우리 일을 도와 주기로 했으니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강남으로 와 보이소."(111쪽)

'신사동 명신빌딩 지하 1층'에서 김성태(준)의 소개로 백준흠(명)과 처음 악수했을 때의 느낌을 정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깨가 좁고 체격이 마른 중키의 사나이에게서 맹금류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첫 마디부터 자랑을 늘어놓는데, 자기 아내가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조카 딸이라고 했다. 물론 나중에 알아보니 다 거짓말이었다. 당시 신건 국정원장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고, 청와대 여성 담당 비서관 신미균이 누님처럼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있다며 청와대와 국정원을 예사로 들먹였다.  보기엔 영락없이 사기꾼 같은데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다. 계속 청산유수로 지껄이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 도와줄 수 있다기에 물었다.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습니까?' '발굴하는 데 들어가는 자금이며 기술 등 모든 것을 제가 다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있는 김성태(준)에게 슬쩍 눈짓을 하여 밖으로 불러냈다. '내가 보기에 전형적인 사기꾼 같은 놈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저런 놈을 믿고 정보를 다 누설했냐? 네가 지금 제 정신이 있는 것이냐?'고 질책했다. 거구의 김성태(준)가 골목에서 억울하다고 펄쩍 뛰었다. '형님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습니까? 우리를 구해 줄 은인인데 은인을 몰라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됩니까? 어디서 저런 마당발 실력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 사람이 우리가 뚫은 수직구 아래 보물 발굴과 그 뒷 마무리를 성공할 수 있는 국내 일인자로 봅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안타까워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수긍이 갔다. 당장에 들어가야 할 돈 때문에 스폰서를 찾아내기 위해 광고라도 해야 할 형편에, 스스로 해 주겠다고 나서니 더 이상 따져서 무얼 할까 싶었다."(111~112쪽)

이렇게, 부산 문현동 어뢰공장 수평굴을 정충제의 수직구가 관통한 후, 얼마 있지않아 김성태(준)가 섭외한 다이버 채상훈(민)의 소개로 합류한 자가 바로 백준흠(명)이었는데, 그는 합류하자 마자 수직구 아래에 있는 금괴 발굴의 주도권을 잡게 되고, 그 결과 정충제는 현장에서 밀려나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문현동 어뢰공장 금괴에로의 수직구 관통까지만 정충제의 몫이었고 그 이후의 촬영과 발굴은 백준흠(명)의 몫이 아니었나 싶다. 정충제는 발굴 현장에 아예 접근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훗날 김성태(준)의 배신으로 현장에 접근이 봉쇄된 2002년 이후, 내가 청와대 비서실로 진정서를 보낸 이유가 노무현이 나에게 했던 당시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2쪽) "나(정충제)는 그들 (김성태, 백준흠, 채상훈) 일당이 현장의 땅부터 매입하는 선수를 치고 (나의 현장에로의) 출입을 결사적으로 막는 의도를 어떻게든 공개적으로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수평굴 내부가 완전히 조작되기 전에 뭔가 물증을 확보해야겠다고 판단한 나는 부산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일부승소' 판결을 근거로 6개월이 지난 2002년 9월 6일에야 비로서 (다른) 다이버를 수직구 속에 들여 보낼 수가 있었다. 그간 일당들의 소행으로 보아서 가처분이란 긴급을 요하는 재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청의 요지를 그대로 옮기면, '문현동 1219-1번지에 직경 60cm로 깊이 16m의 수직굴을 뚫은 주체가 정충제이다. 그런데 김성태(준), 백준흠(명) 등이 현장 땅을 매입하면서 수직구에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 수직구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판결해달라. 그래야만 물속에 잠긴 지하 수평굴의 정체를 알 수 있고, 쌓여 있는 포대 속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 출석한 김성태(준) 등은 시종 거짓말로 일관했다. '정충제 혼자서 수직구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모두는 정충제와 동업자다.' 라는 취지였다. 그때는 이미 그들이 나(정충제)를 부산남부 경찰서에 사기 혐의로 고소한 상태였다."

합류 당시 백준흠의 약력은 합류 약 1년 여 뒤인 2003년 8월 25일 스포츠조선의 '보물을 쫓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백준흠 논픽션 연재물 인터뷰 기사가 실린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백준흠씨는? 1958년생. 항공스포츠 전문가이자 탐사 전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잡지에서 미국 켈리포니아 대학에서 대나무 행글라이더를 타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모험가의 사진을 보고, 항공스포츠분야를 국내에서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행글라이더를 직접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28년 동안 열기구 행글라이더 패러글라이더 모터글라이더 모터패러글라이더 비행선 등을 국내 최초 보급했다. (19)83년 한국해양소년단 행글라이더 연맹, 89년 한국사회체육진흥회 항공스포츠연합회 등 항공스포츠와 관련된 여러 단체들과  90년 항공스포츠 교육사업체 (주)하인(하늘인생)을 창설하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90년대 후반부터는  해저와 육상 매장물을 탐사하는 작업에 집중해 왔다.  2000년 매장물 발굴회사 (주)장보고 살베지를 설립해 현재 일제 때 침몰된 화물선이 군산 장산호, 부산 문현동의 지하 어뢰공장 발굴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문현동 현장에 2002년 초에 합류하기 전의 백준흠은 항공스포츠 특히 열구기와 행글라이더 전문가였던 것이다. 39세였을 때인1996년 12월에 그는 열기구태평양횡단추진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관련 중앙일보 기사 클릭!), 그리고 2001년에는 동 위원회 총괄본부장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2001년의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노무현 의원이었다는 것이다!(관련 안동데일리 기사 클릭). 열구기에 대한 백준흠의 열정은 2018년 6월 현재 그의 트위터 소개글에도 다음처럼 고스란히 드러난다: " 저는 1958년생이며 1975년 고등학교 2학년시절부터 항공스포츠를 시작해서 40년간 열심히 살았으며 제직업은 신약 항암제국내사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암치료에관련되어 궁금하신점있으면 성의껏 알려드리겠습니다." 2003년 스포츠조선에서의 그것과 비교하면 그가 지금은 '신약 항암제국내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도드라질 뿐, 열기구에 관한 열정은 지금이나 그 때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백준흠(명)에 대한 정충제의 최종적인 평가는 물론 '도굴단 두목'이지만 그 인간성에 있어서는 정충제 마저도 '헷갈리는 것' 같다: " '한 닷새 쯤이면 서류 준비가 다 되겠지요? (정충제) 회장님 서류만 준비되시면 곧바로 법인을 출범시켜야지요. 그리고 등기 이사 다섯명도 미리 선정해 놓으십시오. 회장님 가까운 가족들 이름으로 주식을 배분하도록 구상해 놓으셔야 합니다.' 또 이런 말을 들을 때는 정말 헷갈렸다. 백의 본심이 무엇인지 아무튼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으로 보였다." 어짜피 사람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 안에 악의 뿌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교만일 것이다. 끊임없이 그 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어찌보면 인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주목하는 것은 인간성이 아니라 '키신저'(정충제, 실화황금백합작전, 2010, 서울 태웅출판사, 81쪽)와 같이 미 국무성에서 비밀회의를 했던, CIA라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정충제와 일명 교토프로젝트 '비밀 약정'을 맺었던 리차드 P. 롤리스(Lawless)가 '법인'(위엣책, 86쪽)을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백준흠(명) 역시 '법인' 포세이돈 살베지(143쪽)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시간적인 순서로 보자면 롤리스 법인이 백준흠의 그것보다 약 8개월 정도 앞선다. 롤리스의 법인은 2001년 8월 말 경인 반면 백준흠의 법인은 2005년 5월 '임시주주총회'(143쪽)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백준흠이 일루미나티 키신저-롤리스 라인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보인다'가 아니라 '백준흠은 오히려 노무현대통령과 '친분'이 두텁다'이다. 노무현과 백준흠 " 이 둘은 (열기구) 동호인으로 20년 이상을 동거(同居)는 아니고 동락(同樂) 해온 사실이 나타 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서로가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다."(노무현의 청와대가 문현동 금 도굴에 관련 되었다는 24가지 이유, 관련 글 클릭!) 라는 정충제의 주장이 설득력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공익재단'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은 정충제의 뜻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준비된 법인서류를 백준흠(명)에게 정충제가 건네지 않자 백준흠(명)에 의해 '2분도 채 안 돼서'(125쪽) 인근에서 호출된, 전에는 정충제의 수족이었으나 배신하여 지금은 백준흠(명)의 수족이 되버린 김성태(준)가 정충제 납치 시도까지 한 험악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 전체를 100으로 보고, 그 반을 떼어 무슨 공익재단을 만든다는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 아니오? 지분의 반을 그런 명분으로 뒤에다 꼬불쳐 두고 혼자서 독식을 하겠다는 심보에 누가 속아 넘어 가겠소? 그러니 내 말은 공익 재단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고 앗사리 100을 갖고 나누잔 말이오. "
    김성태(준)에 의해 문현동 현장 접근을 '봉쇄'(52쪽) 당한 정충제에게 법인과 관련하여 백준흠(명)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 (정충제의 수직굴이 어뢰공장의 수평굴을 관통한지 24일 후인, 2002년) 3월 26일(은) 백준흠(명)과 내가 합의 사항을 공증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백의 의중은 먼저 20억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한테 미처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문현동 땅 주인을 미리 만났는데, 평당 약 2백만 원만 주면 현장 땅을 팔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특히 지주들이 지하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안 되니 보안을 지켜 달라며, 법에는 매장물에 대한 권리의 반이 지주에게 있다는 말까지도 했다. 땅 550평 매입에 평당 2백만 원씩 11억원이 들어가고, 나머지 9억원 중 4억원은 4월 20일까지 나(정충제)에게 현금으로 지불하며, 5억원은 법인을 설립하여 발굴 경비로 쓸 것이라고 했다. 그 중에 가장 달콤한 말이 현장 땅 550평을 내 명의로 등기 이전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러면 내 지분 10%를 자신[백준흠(명)]의 이름으로 공증해 줘야 투자자들이 믿고 20억원을 투자할 수 있다며, 더불어 자신의 몫도 4%로 달라고 했다. 결론은 합계 14%만 자신의 몫으로 내 놓으면, 발굴 사업이 완료되고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때까지 모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현금 4억원으로 부부 동반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을 반 년 정도 다녀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당시 내 아내가 일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립 서비스였다. '사모님께서 사표를 내도록하십시오. 이제 재벌이 될텐데 초등학교 교사가 어디 어울립니까? 평생 고생만 시켜 드렸으니 이제부터라도 호강을 시켜 드려야죠. 제가 돈을 드리는 대로 홀가분하게 떠나십시오. 이제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저와 김 사장에게 다 맡기고 마음 편하게 한 바뀌 돌고오시면 다 마쳐 놓겠습니다. 백의 말대로 한다면 김성태(준)가 제안한 도굴은 하지 않아도 된다. 발굴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4억 원이란 큰 돈이  손에 들어오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한편으로 백이 미덥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굳이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설마가 사람잡는다'고하지만 그 설마를 만나 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신사동 법률 사무소에서 공증을 하고 백준흠[명]과 함께 그의 사무실에 들러 차를 한잔 마실 때였다."(119~120쪽)

이로부터 9일이 지난 2002년 4월 5일 정충제는 법인에 관련된 서류들을 가지고 백준흠을 만나러 갔으나 오히려 납치당한다: 

나는 산청에서 서류를 준비하여 서울로 올라오며 고향의 아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니, 4억 원도 받고 현장 땅을 등기 이전 받기 전에는 절대로 서류를 넘겨주선 안된다는 당부를 듣고 그러마고 대답했다. 4월 5일 식목일 아침인데 이상 난동으로 그해따라 꽤 날씨가 더웠던 걸 기억한다. 백준명(흠)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법인 서류 준비는 다해 오셨는지요.' '예,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만납시다.' 약속장소를 서울시청 후원으로 잡았다. 덥기도 하거니와 고양에서 나가기엔 교통도 편리하고 휴일이라서 그곳이 한가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이 미리와 기다리고 있었다. 앉자마자 서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내가 서류들을 보여 주기만 하고 약속한 4억원과 현장 땅이 이전되면 주겠다고 했더니, 화가 났는지 파충류처럼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얼굴까지 벌겋게 변했다. 나중엔 눈까지 충혈되어 입을 꽉 다물더니 어디론가 다급하게 휴대폰 번호를 눌러댔다.

2분도 채 안되어 진초록 스타렉스 승합차가 후원쪽으로 달려오더니 급정거했다. 낯익은 차였다. 마포에서 '지리산 흑돼지' 식당을 운영하는 김성준(태)의 친구 하진기의 차로, 문이 열리자 김성준(태), 채상호(민), 돌팔이의사 조읍규(규만), 하긴수(기)가 차례로 내렸다.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백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갑자기 김성준(태)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이 사기꾼아! 빨리 차에 타라. 오늘은 결판을 내자!'하며 차 속에 억지로 밀어 넣으려 했다. 사기꾼이라니?? 김성준(태)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대로 끌려나가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서 그를 힘껏 밀쳐내고 무조건 시청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시에 '사람살려!' 라고 고함치며 큰길을 가로질러서 무교동 입구로 뛰었다. 근처 시청 화단에서 나무를 심던 인부들이 무심하게 일손을 멈추고 바라볼 뿐 도와주는 사람하나 없었다. 영락없이 진짜 사기꾼이 도망치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골목 안에 을지로1가 파출소가 보여서 무조건 뛰어들었다. 일당은 파출소 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자기들이 사기를 당한 피해자라며 사기꾼을 잡아가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경찰이 난처한 표정으로 저희들끼리 모여서 잠시 의논하더니, 김성준(태)에게 '저분은 현행범이 아니니 파출소에서는 처리할 수 없다.'며 원만하게 대화로 풀라고 종용했다.

파출소 옆에 붙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식탁을 가운데로 둘러 앉아 한마디씩 했다. 요점은 지분 배정을 확실히 하자는 얘기였다. 김성준(태)의 선동으로 다수가 나를 협박해서 자기들 몫을 확실하게 챙기고, 여차하면 사기죄로 몰아가자는 작전인 듯했다. 백지가 몇 장 펼쳐지고 관련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쓰였다. 거기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지 못하면 몫도 없는 것이니 모두가 진지했다. 김성준(태)가 주선하여 문현동에 투자한 사람들과 기타 수직구를 뚫을 때까지 도움을 준 인사들이 모두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20%를 자신의 몫으로 고수했다. 그 다음은 하진기와 조규만, 채상민(훈) 순으로 자기 몫을 주장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딱 맞는 표현이었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이 따로 없이 떠들석한 게 정말 가소롭고 가관이었는데, 김성준(태)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체를 100으로 보고, 그 반을 떼어 무슨 공익재단을 만든다는데 그건 새빨간 거짓말 아니오? 지분의 반을 그런 명분으로 뒤에다 꼬불쳐 두고 혼자서 독식을 하겠다는 심보에 누가 속아 넘어 가겠소? 그러니 내 말은 공익 재단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고 앗사리 100을 갖고 나누잔 말이오. 내가 아니면 지하 수평굴을 어찌 찾아낼 수 있었겠소.' 본심이 그대로 나타났다."

납치 위기를 넘긴 정충제는 '한 경찰관'(127쪽)의 도움으로 귀가하여 '아내와 딸을 근처 친척 집으로 보내고, 아들과 함께 동네 찜질방'(127쪽)에서 잔다. 그리고 정충제는 '납치 기도가 있은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수직구를 굴착했던 전 수산중공업 회장 박주영'(131쪽)을 통해 세 번의 회유를 받는다: 

" '정 회장, 좋은 게 좋다고 좋게 합시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매 달 3천만 원씩 품위 유지비를 주고 에쿠스 4.5 새 차 한 대에 기사까지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그는 백준흠(명)이 당초 약속한 대로 현장 땅을 내 명의로 등기 이전 해 줄 테니, 대신 전체 지분 중 50%만 받으라는 얘기도 했다. 지난번 서울 시청 부근 납치 소동 당시에 내가 고수했던 지분 70%에서 20%만 더 양보하라는 조건이었다. 이상의 조건을 수락하면 처음에 주기로 했던 4억 원을 당장 지불한다는 얘기도 했다. ...... 내가 파격적인 조건을 거부하자 며칠 후 서울시청 뒤 '금강산 오리'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정 회장 말을 듣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수직구 공사를 시원하게 결정한 것처럼 정 회장도 화통하게 내 말을 믿고 김성태(준)와 화해하도록 합시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요.' 그날도 밤늦게까지 함께 술자리를 하며 설득을 거듭하고 자신이 수직구 공사 결정을 하게 된 배경까지도 얘기했다. 그러나 나를 더 이상 설득 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이후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2009년 가을, 그의 절친한 동창 친구들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몇 년 전 중국에 가서 정착하여 새로운 사업을 잘하고 있따는 정도다). 김성태(준) 등이 박주영을 고문으로 영입하고 그에게 5%의 지분을 배정한 사실로 미루어 아마도 그 지분을 현금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131~132쪽)

회유를 거부한 정충제는 '대한항공의 노민성 상무'(133쪽)의 도움으로 심야에 '문현동 현장을 기습'(132쪽)하여 어뢰공장 그 가지 굴 내부를 직접 촬영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백준흠(명)과 김성태(준) 등이 '직경 15cm, 길이 1.5m짜리 쇠 파이프 세 개'를 쇠사슬로 묶어 '좁은 수직구를 가로막았 놨다는 것 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수직구를 덮어 씌어 놓는 컨테이너 안 '벽에' '잠수복이 세 벌이나 걸려 있'(135)는 것을 확인한다. 이것은 '평소에 적어도 세 명이 수중에서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135쪽) 
    뿐만 아니라 백준흠과 김성태 등은 김홍랑(련)을 재단의 등기이사로 끌여들어 그녀로 하여금 문현동 현장의 땅550평 중 300평을 사게끔 한다. 정충제의 수직굴이 어뢰공장의 수평굴을 관통한지 정확히 58일 만의 일이다: 

" 백준흠(명)과 문현동 현장의 새 지주 김홍랑(련) 사이에 4월 29일자로 토지 사용 계약이 체결되었다. 조건은 3 개월(2002년 4월 29일~7월 28일까지)이내에 김홍련이 투자한 토지 구입비를 두 배로 산정하여 지불키로 한다. 또한 계약 후 10일 이내에 백준명이 설립하는 인양 및 발굴회사인 (주)포세이돈 살베지의 주식 지분 5%를 받고 등기 이사로 등재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홍랑(련)은 백준명의 말만 듣고 땅을 산 게 아니라, 전남도청 공무원인 남편과 현장 답사를 하고 무인 카메라가 비추는 수평굴의 물 속을 확인한 후 땅을 샀다고 했다. 그녀는 2002년 8월 8일 전남 매일신문에 땅 투기 사실이 크게 보도된 며칠 후, 후속 기사를 또 내보내겠다는 내(정충제) 말을 듣고 경남 진주시청 후문 앞의 삼천포 횟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전 카이스트 원장의 부인 김민주와 같이 나온 자리에서, '왜 문현동 땅을 사게 되었느냐.'는 추궁을 받자, '용서해 주세요. 저는 정충제란 분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백준흠(명)의 말만 믿는게 제 불찰입니다.' '그러면 땅을 산 이유를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백준흠(명)이 현장에서 다이버를 넣고 모니터를 보여주는데 황토색 포대에 일본식 한자가 세 글자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물이 있다는 것을 믿고 샀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옆에서 같이 들었던 김민주가 들은 그대로 확인서를 써 준 사실도 있다.

나는 2002년 5월 28일 고사를 지낼 때, 당시 청와대 여성 담당 비서관이던 신미균이 문현동 현장에 나타나서 찍힌 사진도 의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당시 서울 경찰청 차장인 김기영 치안감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왜 서울에 있는 두 사람이 굳이 무산까지 초청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정권차원의 비호가 비로소 물밑에서 표면으로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즉 김대중 정권 차원의 묵인 또는 방조가 있지 않고서는 사건이 그렇게 전개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사진에 나온 두 사람의 신원을 아무도 모르는데, 백준흠(명)이 현장에서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에 신분을 다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널리 알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기영 차장이 해병대 출신이라는 점도 문현동 사건에 필요한 추진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문제는 김홍랑(련)이 그 땅을 구입한 사실보다 그녀가 지불한 상식 밖의 땅 값에 있다. 그녀에 앞서 조규(은)혜와 정문균(영)은 불과 6개월 전에 한진중공업으로부터 그 부지를 평당 80만원에 공동 불하 받았는데, 김홍랑(련)은 평당 210만원을 주고 350평이나 매인한 것이다. 또 공동 등기자인 정문균(영)은 자신의 몫 200 평은 팔지 않겠다고 하여 조규(은)혜는 지분 1.5%를 가진데 비해 자신은 지분 3.5%를 유지했다."(139~143쪽)

문현동 현장 땅은 원래 대한항공 한진그룹계열사의 한진중공업 소유였으나 'IMF 사태로 인해 구조 조정을 할 때 문제의 땅 550평을 민간인에게'(133쪽) 어뢰공장 수평굴 관통 120 여 일 전에 팔았는데, 바로 이 때 조규혜와 정문균이 평당 80만원에 조규혜는 300평을, 정문균은 250평을 불하 받았다는 것이다.2002년 3월 2일 수평굴 관통후, 한 달 12일 만인 4월 14일 문형동 현장을 심야에 급습하여 그 수평굴 촬영하기 위해 '대한항공의 노민성 상무'(133쪽)를 찾아 갔을 때 그간의 사정을 들은 노 상무는 '정말로 그 땅에서 금이 나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땅을 되찾겠다고'(위엣곳)정충제에 말했다고 한다. 김홍랑이 조규혜에게 평당 210만원을 주고 350평을 매입(4월 19일)하기전 15일 전의 일이다. 이것은 현장 땅의 점유를 위해 정충제와 백준흠이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재단 관련 서류를 넘겨주면 현장 땅 550 평 전체를 백준흠이 정충제 명의로 해 주겠다는 계약 '공증'(120쪽)까지 동년 3월 26일에 하고서도 말이다. 김준흠 일당에 의한 정충제의 납치시도는 동년 '4월 5일'(125쪽)에 발생한다.

문현동 현장 땅을 소유하게 된 김준흠과 김성태 측은 지분 배당을 위한 '포세이돈 살베지 임시 주총'을 2002년 5월 13일에 '부산시 남포동 소재 피닉스 호텔에서' 개최하는데, 땅 소유자들은 모두 참석한다. 물론 정충제는 참석할 수 없었다. 임시 주총 개최여부와 날짜를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충제 몫으로는 가장 많은 비율인 '20%'가 책정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

" 2002년 5월 13일 백준흠(명) 등은 부산시 남포동 소재 피닉스 호텔에서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서 '문현4동 매장물 발굴 사업'에 대해 김성태(준)이 각서인의 대표가 되어 각자 주식 지분을 나눈 후 '백준흠(명) 귀하' 라고 서명 또는 무인하였다. 그 문서를 통해서 비로서 백준흠(명)이란 인물인 모든 일을 꾸민 두목이란 사실을 증명해 준 셈이다. 각서의 내용을 보면 20%에서 0.5%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지분을 나누고 주식 1%당 2천5백만 원이란 지분 매각 가격까지 명시하고 있다. 특이한 사실은 내(정충제)가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임의로 205 라는 비율을 미리 배정해 놓고 빈칸으로 맨 위에 '정충제' 라고 기재해 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20%의 지분도 줄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사전에 나에게 주총 일자를 통보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명백하다. 얼마나 황급하게 작성했는지 서명 날짜가 2002년임에도 말미에 2001년이락 잘못 기재된 사실도 모른채 서명되었다.

이 시점은 수직굴을 뜷고 3 개월이 지났으니, 당시만 해도 그들 스스로 나를 사기꾼으로서가 아니라 최초 발견자로서 상당히 의식하고 움직였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투자자 중에는 당시 서울시청 마케팅과에 근무하던 42세의 조동철이란 공무원도 들어 있었다. 그는 3억원을 투자하고 1%의 주식을 배정받았다. 도대체 정년이 보장된 현직 공무원이 무엇을 믿고 3억 원이란 거액을 선뜻 투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다시 1개월이 지난 6월 12일자로 위의 서명자들 거의가 주주 및 임원직을 자의로 포기한다며, 전권을 조건없이 백준흠(명)에게 위임한다는 이상한 각서에 서명하고 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그토록 지분을 포기하는 이유는 더 석연치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 지하에 아무 것도 없는데 굳이 지분을 포기한다는 게 상식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뭔가 발견했기 때문에 지분을 재 조정할 필요가 있어서 먼저 그런 각서를 받아 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443~146쪽)


어뢰공장과 그 금괴가 없었기 때문에 1개월 만에 지분 배정받은 자들 '거의가 주주 및 임원직을 자의로 포기'했다 라는 당사자들의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들어가 포대자루를 열어 보니 금이 아니라 진짜 '잡석'(150쪽)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면, 서둘러 '자의적으로 포기하는' 각서를 쓰면서 '전권을 백준흠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주들 각 각은 대표격인 백준흠에게 <니가 책임져라>하면서 압력을 가했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백준흠에게 돈을 투자한 사람들일 것이므로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거꾸로 <대표가 잘했으니 대표 마음대로 하시오> 라고 하면서 그것도 '자의적임', 즉 자발적임을 강조하는 표현구를 각서에 명시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권력의 외압이 가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뭔가 발견했기 때문에 지분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어서' 그러했다는 정충제의 해석도 일부 의미있다. 금괴가 발견되기를 기다렸던 정치권력이 그 금괴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을 '재조정'이 의미한다면 말이다. 이와 관련된 것은 키신저와 롤리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과 문재인에 관한 독립적인 글들에서 자세하게 다루려 한다.

김성태에 의해 문현동 금괴 발굴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정충제는 대한항공 노 상무의 도움을 받아 우격다짐으로 그 수평굴에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쇠사슬로 묶여 수직구를 가로막고 있던 '직경 15cm, 길이 1.5m짜리 쇠 파이프 세 개'(136쪽) 때문에 실패했던 것을 거울 삼아, 이제는 부산지법에 '내가 판 굴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 라는 가처분 신청을 다음의 내용으로 낸다: " 문현동 1219-1번지에 직경 60cm로 깊이 16m의 수직굴을 뜷은 주체가 정충제이다. 그런데 김성태(준), 백준흠(명) 등이 현장 땅을 매입하면서 수직구에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 수직구 속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판결해 달라. 그래야만 물속에 잠긴 지하 수평굴의 정체를 알 수 있고, 쌓여 있는 토대 속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법원은 2002년 6월 20일 '쌍방이 싸우지 말고 협조하여 함께 수평굴로 들어가라'는 의미의 결정문을 판시한다. 그러나 '강제 집행문을 받아서 수직구에 정충제가 다이버를 투입하려고 했지만 일당은 흉기를 들고 다이버를 위협하여 투입은 커녕 다이버가 세 번이나 도망칠 정도였다. 그들은 공권력이라고 해서 고분고분 승복하는 호락호락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당시 그들의 행위는 무엇을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해도 어떻게 주물러 놓았는지 무법천지가 되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147쪽)

그래서 정충제는 "우선 2002년 6월 28일자로 백준흠(명)에게 내용증명을 통해 2002년 3월 26일자로 공증 받은 계약을 해제한다는 통보를 발송하고 7월 3일에는 문현동 컨테이너 시설 등에 대한 원상 복구를 통고하는 내용 증명을 보내서"(147쪽) 자신의 권리를 분명히 주장한다. 이 때부터 정충제는 "문현동 현장의 실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언론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다"(149쪽)고 생각하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때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고난의 길에 들어선다.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를 구속한 것처럼 인신을 체포해야만 진실을 알리는 입을 틀어 막을 수 있고 그래야만 악한 일루미타니 프리메이슨 위장이슬람의 권력(탄핵배휴세력)은 위세를 떨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국가 중국과 북한 그리고 이슬람 권의 현재 언론과 인권 상황은 이를 입증하고도 충분히 남는다.

우리는 정충제가 자신의 판 굴 속에 자신이 들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수원지법에 낼 무렵에 이미 저들 백준흠과 김성태 등은 정충제를 '2002년 6월'(관련기사 클릭!) '부산 남부 경찰서에 사기 혐의로 고소한 상태였다'(146쪽)는 것을 기억하고서 다음의 사태 전개를 읽어야만 한다.


부산 남구 문현동 일제 어뢰공장 금괴 발굴 현장에 관한 소상한 내용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149쪽)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지 " 한 달이 지난 9월 6일에야 변호사를 통해 수직굴에 들어가도 된다는 김성태(준)의 연락을 [정충제가] 받고 다이버를 투입시켜 수평굴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채상호(민)의 카메라에 찍혔던 황토색 포대가 있던 장면을 사라지고 대신 잡석이 담긴 한주소금 포대만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가득 쌓여있었다. 그들은 석달 동안 굴 내부를 박수웅이 파다가 실패한 것처럼 조작해 놓은 것이다. 그날 김성태(준)는 현장에 대기시켜 둔 기자들에게 한글이 선명한 한주소금 포대를 건져 놓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박수웅이 판 굴을 정충제가 사기 치려고 뚫은 구멍입니다. 우리는 그가 보물이 있다고 해서 이 땅을 샀습니다. 그래서 10억 원이나 손해를 봤습니다. 정충제는 곧 구속될 것입니다.' 김성태(준)는 나를 도와서 같이 5년이나 고생하며 팠던 굴을 자신의 입으로 사기라고 덮어 씌우고 있었다. 그리고 '정충제가 구속될 것' 이란 장담을 했다. 잔뜩 호기심을 갖고 모였던 많은 기자들은 김성태(준) 일단이 건져서 연출한 한주소금 포대를 보곤 허탈한 나머지 별 의심도 없이 실망한 채 자리를 뜨고 말았다. 현장에 기자다운 기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150~152쪽)


여기서 우리는 백준흠(명)과 김성태(준) 측이 주장하는 내용 전체를 개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문현동 일제 어뢰공장과 금괴들이 역설적으로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백준흠은 2013년 5월 17일 데일리한국의 윤지환기자와의 언터뷰에서 문현동에서의 "보물 발굴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관련 기사 클릭!):


정충제는 자신의 " '황금백합작전'에서 자신과 보물탐사를 했던 이들 중 일부가 보물이 발견되자 자신을 사기꾼으로 매도하고 따돌린 뒤 보물을 도굴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도굴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백씨라는 게 정씨의 주장이다.

" 그러나 백씨는 정씨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정씨는 나를 납치한 뒤 폭행해 그 일로 감옥살이까지 한 사람이다"라며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보물이 있다며 사기행각을 벌이다 사법처리를 받은 뒤에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백씨는 "정씨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박수웅씨와 함께 문현동 보물을 탐사했으나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보물을 찾지 못했다"며 "그러나 자신이 판 굴을 마치 보물이 있는 굴인 것처럼 속여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금전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아직 반성하지 않고 나를 도굴범으로 몰고 있어 그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라고 말했다. 

백씨에 따르면 탐사가 한창 진행되던 당시 지하 굴에서 마대자루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씨는 이를 두고 금괴가 들어있는 마대자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백씨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이며 그 마대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확인한 결과 굴을 팔 때 생긴 돌 부스러기 등을 담을 마대자루였다는 것이다. 
    백씨는 "우리는 지하에서 마대자루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고무됐었다. 하지만 마대자루를 건져 올린 순간 탐사팀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마대자루에는 '한주소금'이라고 쓰여져 있었던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때 무슨 한주소금이 있었겠나. 그리고 그 안에는 돌무더기만 가득했다. 하지만 정씨는 이를 두고 탐사팀이 자신이 발견한 마대자루를 '한주소금' 마대로 둔갑시켰으며 진짜 황금이 든 마대는 빼돌렸다고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백씨는 마대자루의 진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백씨는 "금은 납보다 더 무거운 물질이다. 가로세로 30센티미터면 1톤 정도다. 정씨가 말한 대로라면 굴 안에 쌓여있던 마대자루 1개 안에 적어도 4톤 정도의 금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게 가능하겠나. 그 무게를 마대가 견디지 못해 쌓기도 불가능하고 인간의 힘으로 지하 좁은 굴로 운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마대 속에는 황금도 없었고 마대 역시 일제강점기 것이 아닌 80년대 정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도굴된 보물들 중 상당 부분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백씨는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 말한다."

백준흠은 '마대 자루'라고 하고 정충제는 '황토색 포대'(113쪽)라고 한다. 그리고 정충제는 '5단으로 꽉 재어 있었'(115쪽)던 포대자루에는 '모두 금'(115쪽, 김성태의 전언傳言)이 있었다 라고 하는 반면 백준흠(과 김성태)는 마대자루 '안에는 돌무더기만 가득했다'고 주장하며, 나아가서 백준흠은 마대자루에는 '한주소금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라고 하는 반면 정충제는 '황색 포대 마다'에는 '마닐라 삼으로 포대를 만들어 군납하던 왜놈 회사 이름인'(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50회 방송일: 2004.05.17. 월.,  다시보기 클릭!) '伊藤 忠(이토츄)'(114쪽)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한 쪽이 맞으면 다른 한 쪽은 틀린다. 
    그런데 부산동부지원 판사 박종혁(236쪽)은 '피고인 정충제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241쪽)는데, 정충제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가 바로 박종혁이었다. 게다가 검사의 공소장과 판사의 판결문은 한 자도 틀림없이 정확히 동일하였다: " 이리하여 저는 2005년9월6일 부산동부지청 서범준이란 애송이 검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시작했고 무려44개월이나 징역을 살았습니다. 판결문을 보면 그 재판이 얼마나 ''개판'' 이었는가 잘 말해 줍니다. 검사 서 범준의 공소장은 제 맘대로 완전 창작해 낸 소설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판사 박종훈의 판결문입니다. 공소장과 판결문이 한자도 틀리지 않고 꼭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미리 각본을 짜놓고 그 틀에 맞춰 억지징역을 살린것 입니다. "(중국에서 2012.02.23일 문제인 대통령후보에게 쓴 글, 출처 클릭!)


06) 판결문(목차 클릭!)
따라서, 아래의 판결문을 읽고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뇌는 거짓 말로 쇄뇌되는 것이다. 어찌 대한민국 법원이 거짓을 전파하는 창녀가 되버렸는가! 판결문은, 헌재의 박근혜대통령 위헌 파면의 그것처럼, 진실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권위를 가지고 국민에게 가짜를 강제로 쇄뇌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김일성 공산주의 집단과 똑 같은가. 정충제씨는 그 판결문을 자신의 책(233~234쪽)에 비록 깨알같은 글씨지만 실명은 가린채 실어 놨다:








위와 같은 1심 판결에 대해, 정충제는 자신의 '항소 이유서의 핵심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추려 싣는다:

" 2006년 2월 9일, 내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제출한 항소 이유서에는, 이 사건 판단에 앞서 규명할 '사실 오인'의 핵심이, 문제의 수직굴이 박수웅이 판 굴인가 아니면 정충제가 판 별개의 굴인가에 있다는 점을 조목 조목 예를 들면서 분명히 지적했다.

사기부분에 대해서
만약 내가 받은 돈 때문에 사기죄가 성립되다면 당연히 김성태(준)도 '사기 공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지하 수평굴이 그들의 주장대로 박수웅이 판 굴이 맞고, 그래서 사기를 당했다고 보면 '법인체'는 왜 그때 설립하고, 또 현장 땅은 왜 매입하고, 임시 주주총회는 왜 하는가? 또 주주 명단에 왜 그때 김성태(준)의 말을 듣고 피고인들에게 투자한 사람들 이름이 다 들어 있겠는가? 그들은 그후 피고인과의 관계가 점점 시끄러워지니 '포세이돈 살베지'는 이름을 바꿔 '장보고 살베지'가 되었다.

'무고죄'의 살인 예비 음모 부분에 대하여
나현철은 판사의 거듭되는 추궁에도 '김성태(준)이 정충제를 죽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 이라고 일관된 대답을 고수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 증인이 말을 바꾸었기 때문에 피고인이 저렇게 되지 않았느냐'며 피고인석을 가리키니, 나현철이 더듬거리며 하는 말이 '부산 시경에 두번째 조서를 받으러 갔을 때(담당자 최동건 경사) 백준명이 돈을  20만원 주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길레  말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2005년  11월 14일  3차 심리에서 나현철이 다시 번복하는 증언을 하면서, '김성태(준)이 피고인을 죽이라고 자신에게 지시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기에 판결문의 내용처럼 '피고인이 꾸며 낸 거짓말'이 아님이 증명되었다.(242~245쪽)

판사 박종혁은 백준흠 측의 주장을 백프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피고인 정충제는 '사건대지 지하에는 박수웅이 판 굴 외에 일본군 어뢰기지 등 다른 지하 공간이 없을 뿐 아니라 일본군이 약탈하여 숨겨 놓은 금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충제는 어뢰기지와 금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금 보물이 있다고 사기친 셈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정충제 본인은 그 선고로부터 12년이 지난 2018년 지금까지도 목숨 내 걸고 그 사건대지 지하에는 어뢰공장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어뢰가 있었던 자리에 황금 금편이 든, 이등충이라 찍혀진 황색포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심 문제는 박수웅이 판 굴 이외의 어떤 대형 땅 속 공간 즉 어뢰 공장이 문현동 1219-1번지 지하에 존재하느냐의 여부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박종혁 판사와 그 잔당들이 거꾸로 사기친 것이다. 정충제가 관통한 그 수평굴은 어뢰공장의 가지굴이지, 박수웅이 판 바로 그 땅굴이 아니라는 것이 뿐만 아니라 황금 금편도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07) 박수웅의 굴과 정충제의 수직구와 어뢰공장의 수평굴(목차 클릭!)
야마시로 마사노부(최종욱, 崔鐘旭)(19쪽)로부터 어뢰공장 '보물'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1980년대 후반'(17쪽) 전해들은 박수웅은 '원목더미'(24쪽)가 쌓였던 곳의 한 지점에서 '1989년부터'(39쪽) 신영만, 나현철, 김한수(45쪽) 등 세 명의 인부를 데리고 폭1.5미터 높이1.8미터 깊이'18미터'(175쪽, 181쪽)의 땅굴을 파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 아래쪽 지하가 바로 어뢰공장이야. 잠수함에서 쏘는 어뢰 알지? 이 공장에 있던 어뢰는 다 실어내서 다른 곳으로 옮겼어. 그 빈 공간에다 중국에서 싣고 간 보물들을 대신 숨겨 놓은 거야."(24쪽)

"박수웅이 동원한 장비라고 해봐야 에어컴프레서로 작동하는 착암기에다 육각형의 비트(bit, 길이 105m, 직경4.2cm)를 꽂아 물을 쏘아가며 1~2cm 간격으로 바위에 구멍을 파서 깨트려 전진하는 식이었다. 그 정은 스웨덴제 특수강으로 쇠막대기 한 개당 8만원이나 하는 고가였고, 에어컴프레서에 사용되는 기름 값에다 세 명의 노임과 식비를 합하면 매일 지출이 만만치는 않았다. 특히 바위가 단단해서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또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하루 아홉 시간 작업해봐야 겨우 10cm 정도 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작업 중인 인부들에게는 오전 10시쯤과 오후4시 경에 빵과 우유 등 간식이 제공되었다. 벨 소리로 점심시간을 알리면 폭1.5m, 길이 1.8m의 수직구에 설치해 둔 사다리 앵글을 타고 굴에서 기다시피 올라오는 전형적으로 원시적인 작업 방식이었다."(34쪽)

'1992년 10월 어느 날'(38쪽) 정충제가 박수웅을 찾아 그 현장을 찾아 갔을 때, 박수웅은 '1989년부터 일꾼들을 데리고 수직굴을 파다가 돈이 떨어져서 새로운 물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39쪽)
    정충제는 '박수웅'(38쪽)에게 '발굴 경비 1억원을 투자하면 10% 지분을 받기로'(41쪽) '1992년 10월 어느날'(38쪽) 약속하고 ,1억원을 박수웅의 통장에 '입금'(44쪽)한 다음에야 비로서 '문현동 굴착현장'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2억원이 박수웅에게 정충제에 의해 더 건네진다.

"1996년 2월 경에는 굴을 파던 인부들이 몰사할 뻔했던 일도 있었다. 정오가 되면 정확하게 점심을 먹으러 올라오는 인부들 세 명이 그날따라 아무런 기척이 없어서 박수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굴속에 내려가보니 인부들(신영만, 나현철, 김한수)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구급차를 불러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은 건졌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다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가스중독' 이라고 하면서 독가스인데 무슨 가스인지 알 수가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으며, 그 후유증이 3개월이나 갔다. 힘이 없고 비실거리는 상태로 3개월 동안 놀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며 방독면을 사 달라고 해서 내가 자갈치 시장에 가서 미제 방독면을 사다 준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부들이 마셨던 맹독가스는 어뢰를 제조할 때에 사용되는 황산으로 인한 화학물질이 물과 반응한 독가스였다.

그 후 박수웅 외 1인(신정일 전 대통령 후보)은, 1997년 1월 16일부터 1998년 1월 15일까지 1년간 부산시 남구 문현동 1219-1에 대해 남구청으로부터 정식으로 발굴허가를 얻었다. 제출된 명세서에 적힌 소요자금은 불과 4천5백만 원이었으며, 인부들을 고용하여 본격적으로 지하 굴진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지하 동굴을 발견하지 못한 채 허가 기간마저 다 지나버렸다. 그렇게 박수웅이 전부 파 들어간 길이는 22m에 불과했다. 중간 중간에 지하수를 만나 길을 찾기 위해 옆으로 조금씩 파 들어가기도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마침내 박수웅은 1999년 3월 5일 남구청으로부터 '매장물 발굴 승인 기간 만료에 따른 통지' 라는 원상 복구 공문을 받게 됨으로써, 사실상 문현동 현장에 대한 계속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공동 허가권자인 신정일은 한얼교 교주로서 그 공사에 공탁금으로 5억 원을 투자했으나, 그 후 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2001년경 강화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정일 씨가 무얼 믿고 그 큰 금액을 투자했는지는 의문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2005년 6월 현재, 5억원의 공탁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내가 직접 확인했다는 사실이다. 그 공탁음은 구청에서 허가를 내 줄 때 원상 복구에 드는 비용을 미리 예치토록 한 것으로, 공탁금이 집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박수웅이 자기 경비로 수직굴을 다 메웠다는 반증이 된다. 이 문제는 나중에 법정에서 핵심 쟁점이 되는, 내가 판 수직굴과 박수웅이 굴착하고 메운 수직굴이 서로 다르다는 점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45~46쪽).

정충제의 '실화 황금백합작전' 이라는 책에 따르면, 문현동 어뢰공장 현장에서의 박수웅 활동은 1998년 초까지인 듯하다. 본 글 '4장)박수웅과 정충제'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충제가 두 가지 이유에서 박수웅과 '결별'(47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충제와 결별한 박수웅은 정충제의 그 "수직굴이 뚫릴 때까지 수년 동안 문현동 현장 부근을 떠나지 않았고, 늘 주변을 맴돌며 집착했다."(89쪽). 

박수웅외 1인(신정일 전 대통령 후보)이 부산 남구청장으로부터 1997년 1월18일 매장물 발굴 허가 받아, 그로부터 1998년 1월 15일까지 1년간 박수웅이 지하 18미터에서 뚫고 나간 땅굴의 길이는 '22m에 불과했다'(46쪽). 그리고  그것도 다시 '원상복구'(46쪽)되어서 모두 메꾸어졌다. 물론 1997년 1월 이전에 박수웅이 굴진할 것 등을 합하면 판결문에 나오는 '50m'가 될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당시 작업 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나현철씨의 아래의 '작업 확신서'를 확인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정충제의 '실화 황금백합작전'을 역사소설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다큐멘터리 즉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처럼 정충제 씨는 기록된 어떤 사건이나 뉴스가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서류나 사진을 필요할 때 마다 삽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실화 황금백합작전'에 나오는 날짜나 치수 등 등을 사실의 그것으로 간주한다. 박수웅외 1인이 부산 남구청장으로부터 매장물 발굴 허가 받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아래의 사진은 그 책 곳 곳에 흩어져 있는 수 많은 증거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박수웅이 판 굴은 정충제가 뚫은 수직굴 착구 근처까지 와 있었다. 김(성태) 등은 이걸 알고[아] 내고서 박수웅의 글과 연결 관통 시켜 놓고 연결된 두 굴 전체를 박수웅이 판 굴이라 했고 검사[와 판사]는 이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정충제가 구속된 것이다."(181쪽) 더구나, 박수웅의 굴과 정충제가 찾아낸 어뢰공장 가지 수평굴은 그 깊이에 있어 '2m'(220쪽)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박수웅의 땅굴은 어뢰공장의 그 가지 수평굴의 2m 아래 '근처'(181쪽)까지 굴진해 온 것이다. 게다가 박수웅이 판 굴은 다시 모두 메꾸어졌다는 것은 당시 굴을 판 세 명의 인부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2004년 4월 2일에 이들 세 인부들은 다음과 같은 <확인서>를 남긴다:

"아래의 사람(3명)은 부산시 남구 문현동 1219번지에서 박 대통령의 이발사 박수웅이 일본 어뢰 공장을 찾기 위해서 굴을 팔 때 종사한 인부들입니다. 1997년 굴을 폐쇄할 때 남구청에 원상 복구가 되었다는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판 굴을 모두 막았습니다. 막는 방법은 1m마다 둑을 쌓을 때처럼 마대에 돌을 넣어 한 줄로 쌓아 놓고 그 너머로 파쇄된 돌 조각을 무조건 퍼 넣었습니다. 주먹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습니다. 또 1m마다 그렇게 하여 수평굴은 물론 수직굴까지도 그렇게 공간을 꽉 막았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빈 공간은 일체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저희들이 작업을 할 때 전진했던 공법은 42mm 노미로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의 깊이는 70~80cm였습니다. 이 내용을 확인합니다. 

2204. 4. 2. 
신영만 
나현철 
심상오 

신영만은 착암공이고 나현철은 운반공으로서, 굴착 시에 나오는 돌 조각들을 50kg 정도가 되면 포대에 채워서 수직굴 사다리 앵글을 통해 반출해 냈다고 한다."(167쪽)



1) 허가기간(1998년1월15일)이 끝난 직후 박수웅의 굴이 진짜로 다시 메꾸어졌느냐의 여부. 2) '정충제의 수직굴에 의해 관통된 굴이 어뢰공장의 그 수평굴이냐 아니면 박수웅의 굴이냐'의 여부. 3) 수중 카메라에 비친 황색포대가 박수웅의 굴을 다시 채우고 있는 돌이 든 마대인지의 여부. 박종혁 판사는 고소인 백준흠과 김성태 등의 주장을 받아 들여, 1-ㄱ)진짜로 매꾸어졌고, 2-ㄴ)정충제의 수직구는 그 직후 다시 메꾸어진 정수웅의 굴을 관통한 것이며, 그리고 3-ㄷ) 촬영된 그 5 단의 황색포대들은 되 메우기된 박수웅의 굴 안의 돌 조각이 든 (한주소금) 마대들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정충제로서는 요절복통할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이에 목숨 걸고 16 여 년이 지금까지 그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황색포대에는 금편이 들어 있음을 자신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그 판결에 대해 정충제는 네 가지 의혹을 제기한다.


" | 네가지 의혹 |
1. 고의적인 연결
그들은 이미 수평굴 속을 나름대로 치밀하게 조작하여 변조한 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첫 촬영했던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伊藤 忠' 석자가 찍힌 황색 포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전혀 다른 '한주소금' 포대를 쌓아 놓았다. 그건 박수웅이 파다가 실패한 굴처럼 보이기 위한 변조의 기초 작업이었다. 박수웅과 함께 일했던 라현철 등을 매수하여 박수웅이 실패한 굴의 깊이가 18m란 사실을 알아 낸 후, 그 가지 굴에서 2m 더 높이 45도 각도로 올라 간 방향에서 수평굴과 3m 정도의 연결 통로를 뚫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수웅이 원상 복구하며 꽉 채워 놓았던 돌 포대를 수평굴 위로 끌어 올려서 박수웅이 팠던 굴처럼 주장했다고 본다. 당시 김해에 거주하는 수중 물막이 최고 기술자인 정윤진을 영입하여 수평굴 내부에서 물막이 차단 공사를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물을 전부 퍼내서 작업하지 않고선 물이 차 있는 상태에서 깊이가 2m 차이나는 수직굴을 그런 식으로 연결시키는 게 불 가능한 작업이라는 데 일치된 증언을 한 바 있다.

2. 분수현상
특히 수직굴이 관통된 직후의 힘찬 분수는 김성준이 카메라로 직접 찍어서 보관한 것이었다. 그 사진(오른쪽, 103쪽)한 장이 문현동 지하에 얽힌 모든 의혹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된다. 김성준은 본래 사진 찍기를 좋아하여 걸핏하면 1회용 카메라를 사서 찍곤 했는데, 이 장면을 스스로 찍어 둔 게 뜻밖에도 나에게 입수되었다. 취미로 찍었던 사진 한장이 결국엔 자신을 옭아매는 동아줄이 되어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들이 변조한 수평굴을 설사 박수웅이 파 놓은 굴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분수 현상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작은 굴에서는 한 방울의 물도 지상으로 뿜어 낼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물을 그렇게 지상으로 밀어 올릴 만한 수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이 20m 높이로 솟구치기 위해서는 지하에 최소한 25m 높이의 공간에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하는 물리적 법칙이 있었다. 직경 60cm의 수직구를 통과한 물 기둥이 세 시간 이상 17m 높이로 계속 뿜어 나왔다는 사실을 과학이 아니고서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하 16m에다 지상 17m를 더하여, 도합 33m의 높이로 물기둥이 솟아오른 현상은 물리적인 법칙의 결과였지, 결코 사람이 일시적으로 조작해 낼 정도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제가 구축한 엄청난 규모의 어뢰 공장이 물에 잠겨서 지하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명이다. 이런 엄연한 물리적인 현상과 증거, 또 증인의 증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일방적으로 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175~177쪽)




솟구치는 문현동 어뢰공장 수평굴의 물 ↑,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50회 방송일: 2004.05.17(월)


    지하 어뢰공장 탐사 10년 만에 그것의 수평굴이 관통되는 순간을 비록 현장에서 '5분'(102쪽)거리에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정충제 선생은 다음처럼 기록한다: " 지리산에서 최도사로부터 박수웅의 문현동 어뢰 공장 발굴 얘기를 처음 들은 지 거의 10년 만인 2002년 3월 2일 오후 다섯 시 경, 드디어 지하 수직구가 뚫렸다는 현장의 전화를 받았다. 수평굴과 관통되는 순간, 거대한 공간 속에 갇혀 있었던 엄청난 양의 물이 센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직경 60cm의 좁은 수직구를 통해 분수처럼 밀고 올라왔다고 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몇 걸음씩 물러섰고, 동굴은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한 기세로 17m 높이의 물줄기를 세 시간 이상 하늘로 뿜어 댔다. 오후 늦게 물줄기가 멈추었다는 보고를 받고, 용접공을 불러다 그 입구를 막은 원통 위에 뚜껑과 고리를 달고 자물통을 채워 놓으라고 지시했다. 도굴 방지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나 가서 들여다 보다가 빠지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다이버를 한 사람 구하는 일이 남았다. 수직구 아래 지하 4m 지점에 수면이 고정되었으니, 말하자면 4m 깊이의 초대형 우물이 문현동에 하나 생긴 셈이었다."(103~105쪽) 이로부터 16 년 여가 지난 2018년 6월 3일 유투브 태평티브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분수대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 화약 발파 흔적과 천공 규격
수평굴이 관통된지 여섯 달 후에야 내가 고용한 다이버가 수직굴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도굴 현장이 공개되어야 할 순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발굴하고 주장했던 일제 강점기의 수평굴이란 존재가 원천적으로 부인 당하는 현장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수평굴 속에 남아 있는 화약 발파 천공 규격으로 인해 그 동굴 스스로 출생 년도를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두 군데도 아니라서 그건 조작하려고 해도 결코 조작할 수 없는 부동의 증거로 남아있다. 더욱이 3년 후인 2005년 7월 14일 오후 1시에 진행된 검사 서범근 입회 하의 현장 검증에서 통영의 다이버 김원택이 찎은 사진에도 화약 발파와 천공 흔적(오른쪽사진, 178쪽)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4. 수평굴이 직각으로 꺾인 이유
또 하나의 의문은 다이버 김원택(아래 사진, 179쪽)이 수평굴을 탐사하며, 돌 포대로 막아 놓은 수평굴이 직각으로 꺾여 들어간 곳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돌 포대를 7m나 치우면서 전진했지만 당시 물 속에서 심하게 일어나는 먼지로 인해 시야 확보가 곤란하여 더 전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당들이 의도적으로 수평굴 속의 출입을 막아야 할 만큼 특별한 사유가 반드시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굴 입구에서 발견된 보물을 후일을 위해 더 깊숙한 곳으로 숨겨 놓을 의도였든지, 아니면 깊숙한 곳의 보물을 일단 들키지 않도록 감춰 놓을 의도였든지 둘 중 하나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폭탄을 제조하는 군사 시설이 아니면 일부러 직각으로 굴착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박수웅이 굴착했다가 원상 복구한 수평 가지 굴은 7m 정도나 전진한 적이 없었다는 작업부들의 일치된 증언이 있었다. 따라서 내가 발견한 그 수평굴은 박수웅의 굴과 구별되는 제2의 굴로서, 일제 강점기에 굴착한 거대한 어뢰 공장에 부속된 가지 굴이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특히 2003년 2월 13일 YTN을 통해 제기된 '수평굴의 조작 가능성'은 다시금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 방송 화면은 이후 다른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취재를 할 때도 당연히 인용하는 참고 자료가 되었다."(177~182쪽)


2003년 02월 03일의 ' [중점] 지하 동굴 보물? 논란 ' 이라는 YTN 황보연 기자의 인터뷰는 ' 부산항 지하에서 발견된 굴이 10년 전 또 다른 보물 발굴업자들이 판 굴이라는 백 씨 등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반대로 일제 시대 굴속에 막대한 금과 보물이 있었다는 정씨의 황당하기만 했던 주장은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 라고 끝난다( 관련 기사 클릭! ): 

" [앵커멘트] 
일제시대 지하동굴에 보물이 숨겨 있다고 믿으면서 수년간 동굴 찾기에 나섰던 보물 발굴업자들이 막상 굴을 발견하자 두패로 갈려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각각 상반된 기자회견까지 벌인 끝에 이 굴이 일제시대때 굴이 아니라는 주장이 최근까지 설득력을 얻었었지만 여러가지 증언과 단서들이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습니다. 황보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지난해 초 부산항 지하 16미터에서 보물 발굴업자들이 찾아낸 지하 동굴입니다. 작가 정모씨와 함께 발굴작업을 벌여온 백모씨 등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굴이 10여년전 다른 보물 발굴업자가 판 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터뷰:백모씨,보물발굴업자] "거기에 한주소금 마대(자루)가 나오더라구요 일제시대때도 한주소금이 있었습니까?" 당시 기자회견에서 나모씨는 이굴을 직접 팠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나씨는 당시 발견된 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백씨측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나모씨,채광기술자] "기자회견 이전에 굴 내부를 찍어온 화면을 봤습니까" "못봤어요 그럼 내가 판 굴이라고 얘기할 근거가 없잖아요" (백씨 측근이)나장군(본인)이 팠다고 하세요 기자들이 물어보거든 그렇게 시켰어요" 만일 백씨등의 주장이 맞다면 나씨가 10년전에 판굴과 새로 발견된 굴은 모든 면에서 일치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씨가 실제로 팠던 굴과 새로 발견된 굴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나씨와 10여년전 함께 굴을 팠던 인부에게 새로 발견된 굴에서 수거해온 자루를 보여줬습니다. 

[인터뷰:신모씨,나씨와 함께 일한 인부] "(우리가 사용한 자루는) 길이가 이정도 되고 넓이는 이정도 되고 커요.돌을 여기다 몇개나 담겠어요 (마무리는)인계철선 있지 인계철선" 굴의 형태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실제 팠던 굴은 천장이 아치형이었지만 새로 발견된 굴은 천장이 일직선인 직사각형 모양입니다. 이런 점을 근거로 정씨는 백씨 등이 일제시대 굴을 10년된 굴로 위장했다고 주장합니다. 백씨 등이 안에 있던 막대한 양의 금과 중국 불상 등 보물을 몰래 빼낸 뒤 이를 숨기기 위해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정충제 작가] "그 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의혹을 숨기기 급급해 물속이니까 함부로 폭로가 안될 것이다 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못된 계산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한다는 것이 생사람 잡는 일이 아니고 뭡니까" 특히 백씨 등과 함께 일을 하며 발굴 현장 경비를 맡았던 인부는 굴안에 있는 플라스틱 파이프를 지난해 백씨 등이 직접 설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최모씨,발굴현장 경비담당] "이만하데요 pvc가 포터에 싣고 들어오더라구요.그리고 마당에 놓고 작업을 했어요.근데 그걸 어디에 넣는지 잡아 넣긴 넣는데" 발견된 굴안에 있는 철근과 철사의 부식 상태도 굴의 위장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도저히 같은 시기에 함께 굴속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인터뷰:울산대 교수] "원형으로 생긴게 아니고 일본사람들이 옛날에 판 것을 보면 사각으로 터널을 뚫은 것 같더라구요 높이가 2~3미터 되는 걸로 기억되는데요" 

부산항 지하에서 발견된 굴이 10년전 또 다른 보물 발굴업자들이 판 굴이라는 백씨 등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습니다. 반대로 일제시대 굴속에 막대한 금과 보물이 있었다는 정씨의 황당하기만 했던 주장은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YTN 황보연입니다. 황보연[hwangby@ytn.co.kr]. 


정충제의 수직구가 관통한 것이 어뢰 공장의 그 가지굴이 아니라 박수웅이 판 굴이라면 나도 이런 장황한 글을 힘들여 정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 굴 안에는 금편들이 가득 들어 있는 황색포대들이 5단으로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제 이 금편들 대한 언급들을 따라가 보자.


08) 황금의 목격자들(목차 클릭!)
금편에 관한 언급들 중에 그 어떤 것보다 리얼한 것은 지리산으로 납치 당한 백준흠의 '주머니에서 '작은 금편 하나가 툭 튀어 나'(214쪽)왔다는 정충제의 주장은 아주 리얼하다--물론 그 이전에 정충제가 백준흠 등에 의해 보물이 발견된 직후 '납치'(125쪽) 당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부분부터 인용해보자:

" 너무나 살기등등한  깡패의 위협에 겁에 질린 백준흠[명]이 다급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 ..... ?? 무슨 황금 불상요? 저, 그런 거 없습니다. 살려 주세요. 불상이 아니라 금이 산더미처럼 있습니다.' 라고 했다. 뜬금없이 '산더미 같은 금이 있다'는 말을 듣곤, 병을 깨서 협박한 당사자도 헷갈려서 두목 정태섭에게 상황 보고를 했던 것이다. 자기들끼리 의논을 해봐도 뭐가 진실인지 결론이 나지 않자, 나[정충제]를 불러서 금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여부를 확인했다. 별 수 없이 문현동 현장을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애초 생각보다 더 커졌고 백준명은 더 큰 인질이 되었다. 밤도 늦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작전이 수행되었다. 가까운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지리산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보안 관계상 내가 잘 아는 민박집을 예약하고 다섯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 때 나와 백준흠(명)이 각기 다른 차량을 타고 간 것이 문제였다. 백준흠(명)은 행선지도 모른 채 납치되어 가는 동안 당연히 두목 정태섭에게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며 그를 포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납치나 살인 청부업자들의 생리가 다 그렇듯이, 납치를 부탁한 쪽보다 더 큰 돈을 줄 테니 자신의 목숨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상황이 반전되어 가는 줄 모른 채 민박 집에 먼저 도착하자 준흠(명)이 차에서 내려 큰형님 운운하며 다가오기에 화가 나서 마루에 올라서는 백의 허리춤을 잡아서 방바닥에 대동댕이쳐 버렸다. 순간 그의 주머니에서 작은 금편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나는 생각지 않게 실물 증거를 확보했다 싶어서 얼른 집어서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는데, 그걸 본 조폭 두목 정태섭이 정색을 하고 손을 내밀었다. '이봐요, 정 선생님! 그게 어디 정 선생 거요? 왜 당신 거도 아닌 것을 허락 없이 가져갑니까? 이제 보니 안 되겠구먼 ...... ' 하고 빼앗아 가 버렸다. 정말 주고 싶진 않았지만 주위가 온통 그의 부하들인 데다 반대로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판국이라 내줄 수 밖에 없었다."(213~214쪽)

황금색 금편을 봤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윗 인용글에서는 '금편은 없었다' 라고 하면서 정충제를 사기와 무고 죄로 고소한 당사자들 중의 하나인 백준흠의 주머니에서는 금편이 튀어나와 그 사진이 찍혔고 또 다른 당사자인 정성태의 입에서는 '오늘부터 우리는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113쪽) 이다 라고 하면서 정충제에게 '형님 놀라지 마이소. 굴 속의 포대 안에 든 게 모두 금입니다, 금!"(115쪽)이라고 전화기 속에서 외쳤으며, 그리고 이들 세 명의 당사자들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그 금편을 봤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비록 백준흠과 정성태는 법정에서 자신들은 그 금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지만 말이다. 먼저 정충제가 정성태의 입을 통해서 그 금편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드라마틱한 그 순간을 읽어 보자. 이건 소설이 아니다:

" [ 정충제의 수직구가 어뢰공장의 그 수평굴을 관통한 날인 2002년 '3월 20일'(110쪽)에서 십 수일 지난  어느 ] '날 오전, 김성태(준)의 전화를 받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된 목소리였다. '야! 좀 작게 말할 수 없나? 목소리가 울려서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다.' '형님! 놀라지 마이소 엄청난 일이 생겼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기고? 흥분하지 말고 좀 차분하게 말해 봐.' 고막이 터질 듯이 목소리가 컷다. 아무리 작게 말하라고 해도 좀처럼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했다. 여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 그가 전한 말은 대충 이랬다.
    다이버 채상훈(민)이 지하에 들어가기 전에 물에 잠긴 수평굴 속을 촬영할 목적으로 일제 소니 수중 카메라를 수직굴 속에 넣어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첫 번째로 찍힌 화면에서 황토색 포대가 차곡 차곡 빈틈없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포대마다 한자漢字가 세 글자씩 찍혀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다. '그 글자가 무슨 자드노?' '한문이 두 자는 붙어있고 한 칸 띄어서 마지막 글자는 형님 이름 가운데 자인 충성 충忠자던데요.' 나중에 테이프로 확인해 보니 그 글자는 '伊藤 忠' 이란 일본어 였다. 김성태(준)는 기고만장해서 호들갑을 떨었으며,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란 말을 여러 번 반복하였다. '그 테이프를 고속버스 편으로 빨리 서울에 올려 보내라.'벌써 보냈씁니다. 지금쯤은 아마 강남의 백준흠(명) 사무실에 도착했을 겁니다. 테이프를 보려면 비디오 시설이 있어야 되니 거기 가서 보면 될 겁니다.'
    백준흠(명)에게 연락하니 태연한 음성으로 테이프를 찾아서 갖다 놓았다고 하며, 사무실에 오면 같이 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진수를 급히 불러서 그의 스타렉스 승합차로 신사동으로 달려가니, 기다리고 있던 백준흠(명)이 테이프를 보여 주었다.

수평 동굴 내부에 대한 최초의 수중촬영으로, 다이버 채상훈(민)이 지상에서 내려 보낸 수중 카메라 모니터에는 놀랄만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먼저 지상의 장면들이 보여지고 수직구 안으로 카메라가 내려가고 있었다. 묵직하게 덩치 큰 카메라 등 쪽 두 군데가 밧줄로 묶여 있었는데, 카메라 렌즈가 전방을 향해 수평으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듯했다. 물속에 거친 암벽이 보이며 천천히 내려갔다. 작은 기포들이 수없이 위로 솟구쳐 오르고 부유물들이 떠다니는 것까지도 세세하게 화면에 나타났다. 수중은 거울처럼 투명했고, 화면 우측 상단에 수심을 나타내는 숫자가 12m를 가리키자 수평굴의 천장이 나타났다."(109~114쪽)

문현동 현장의 정충제 수직굴이 어뢰공장의 그 수평굴을 관통할 때도 정충제는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인근에 있었으며, 그리고 채상훈 다이버가 맨 처음으로 어뢰공장 그 가지굴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들어가기 전에 맨 처음으로 관통된 수평굴 내부를 수중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도 정충제는 몰랐다. 단지 이 모든 것을 주관한, 자신의 복심이었던 김성태의 전화 연락을 듣고서야 정충제는 굴 내부 영상이 촬영됐다는 것을 비로서 알았으며 그리고 그 첫 촬영 영상도 서울 강남 신사동의 백준흠 사무실에서 비로서 백준흠의 '허락'을 득하고서야 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수직굴의 위치를 정확하게 지정해준 사람이 정충제였지만 말이다. 굴 안에 금편이 든 황색포대가 발견된 순간부터 아니, 채상훈이 그리고 연이어 백준흠이 김성태를 통해서 자신에게 소개된 순간부터 정충제는 백준흠과 김성태 등의 무리에게서 배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편 발견 당시의 서류들과, 그로부터 2 년이 흐른 뒤인 2004년 5월 17일 월요일에 방영된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50회 방송분에서의 설명과, 8 년이 흐른 뒤인 2010년 1월 15일 발간한 위엣 책 '실화 황금백합작전'에서의 기술(記術)과, 그리고 16년이 흐른 뒤인 2018년 6월 3일의 유투브 태평TV에서의 열정적인 증언은 인간 정충제가 부산 남구 문현동 1219-1 번지 일제 어뢰공장 그 수평굴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목격자 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 황색 포대마다 찍힌 '伊藤 忠' |
" 천장의 모양은 사각으로, 양쪽 모서리는 각이 져 있으나 울퉁불퉁하게 거친 바위 면이 보였다. 또 한 자尺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홈이 파인 걸로 모아, 발파를 위해 화약을 넣었던 구멍 같았다. 이윽고 김성태(준)이 흥분해서 말했던 황색 포대에 일본식 한자 '伊藤 忠'(이토츄) 석 자가 선명하게 찍힌 채 나타났다. 포대의 규격은 일정했으며, 천장에서 5~10cm 정도의 빈 공간만 남기고 5단을 꽉 재어 있었다. 바닥은 모두 엄지 손가락 마디만 한 밤톨 형태의 검은 자갈이었고, 군데군데 붉은 황토가 얇게 가라 앉아 있었다. 물빛이 투명하여 포대 가장 자리의 바느질 자국까지 선명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성태(준)이 흥분해서 소리지를 만한 화면이었다. 저렇게 포대 속에 담아 지하에 숨겼다면 그게 소중한 물건임은 틀림없다는 결론만 내렸다.
    포대를 치우고 들어가 보면, 그토록 찾았던 일제 어뢰동굴의 실체를 찾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남은 숙제는 다이버가 내려가 포대 한 개를 끄집어 내서 지상으로 올려 내용물을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당국에 신고하고 언론에 알리면 그날로 정충제라는 이름 석 자도 세상에 크게 알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백준흠(명)의 지하 사무실에서 테이프를 열다섯 번 정도는 반복해서 본 것 같다. 함께 본 사람들은 함께 갔던 하진수(기)와 백준흠(명)이 부른 삼애인더스(당시 코스닥 상장 기업)의 부장 김인호 등 네 명이었다.
    다음 날 김성태(준)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해서 오전 열 시경, 백준흠(명)의 사무실로 갔다. 백준흠(명)과 채상훈(민), 그리고 김성태(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김성태(준)이 한쪽 구석으로 날 부르더니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형님, 놀라지 마이소. 굴속의 포대 안에 든 게 모두 금입니다. 금!' '그 금이 어디에 있노?' 아이고 형님도 참, 형님이 한 개라도 마음대로 꺼내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아닙니까? 내가 쇠고랑 찰 일이 있습니까? 그대로 넣어 두었지요.' 순간 그가 금을 가져온 줄로 알았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는데 김성태(준)은 소눈깔 같이 큰 눈알을 굴리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만약 금이 발견된다고 함부로 슬쩍하면 찾은 공은 뒷전이고 쇠고랑부터 차게 될 것이라고 들었던 주의를 잊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의심의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얼른 말을 바꾸었다.

| 충동질하는 도굴 |
'그런데 형님, 그 많은 금을 어찌 처리할 겁니까?' "(113~116쪽)
    

정충제의 '복심'이었던 정성태가 배신하기 전에 정충제에게 무심코 내 뱉은 탄성과 고성은 금편이 발견됐음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 정충제의 세세한 묘사가 너무 생생하고 리얼하고 장엄하며, 껍데기로 둘러쌓여 잠들어 있던, 침묵 속의 순간들을 한 올 한 올 열어재끼는 듯하다. 보물이 발견된 것이다.

금편들을 봤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쌍방 간의 법정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당시 위의 영상( 2004년 5월 17일 월요일의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50회)에는 어떤 한 증언자가 자신이 본 금편의 모양을 오른 쪽 그림처럼 백지 위에 그려내며, 또 다른 사람은 그 크기가 '초콜릿' 같다고 증언한다. 정충재가 백준흠의 허리춤에서 튕겨 나온 것과 같은 금편을 찍은 사진과 정확히 비슷하다. 벌써 세 명의 증언과 증거가 일치한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증거와 증언은 문제인의 세계 금 보유 순위 21위 라는 설이다. 도굴한 금괴는 공식적인 순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현동 어뢰공장 그 수평굴에서 발견된 금편에 대해 증언하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문현동 어뢰공장 수평굴에서 금편이 도굴됐으며 도굴된 굼편을 봤다고 2002년 주장했던 정충제는 16년이 지난 2018년 6월 3일에도 확신에 찬 언어로 아주 생생하고 리얼하게 태평TV 유투브에서 동일한 주장을 반복한다(출처: 태평 닷컴 클릭!):




09) 백준흠의 메일과 댓글(목차 클릭!)
문현동 일제어뢰공장 징용자 천여명 생매장과 문제인 금괴 도굴에 대한 태평 TV에서의 연이은 폭로에 관한 국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물론 국내 모든 언론과 모든 유투버들은 철저히 이에 대해 함구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충제에 의해 도굴단 두목으로 지칭되어 실랄하게 비난받은 백준흠은 즉각 반응을 보여 다음과 같은 메일을 태평TV 김일선 교수에게 보낸다. 만약 백준흠씨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본 글의 제목은 달리 잡혀졌으리라. 메일 협박 건으로 인해 나는 백준흠을 통과하지 않는한 어뢰공장 금괴 도굴사건의 본질이 밝혀지질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아, 이 분의 실명을 거론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준흠이 지닌 소장 자료나 해명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글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분에게 미안하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미 인용한, 백준흠 본인이 신문과 방송에서 지금까지 직접 한 실명의 인터뷰들에서 그의 입장은, 짧았지만, 드러났다고 본다. 만약 백준흠씨 본인이나 백준흠씨 지인이 이글을 보고, 글쓴이에게 전달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내용이 있으면, auldoong@drivehq.com 으로 메일 주시면 고맙겠다: 


태평 TV에서 공개한 메일 전문은 다음과 같다(출처 태평 닷컴 클릭!): 

" 2018년 6월 3일 (일) 오전 9:56, 골드오션 <12995181 @hanmail.net>님이 작성:

김교수님 백준흠입니다. 첨부물을 꼭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교수님께 드린 6월2일 12시까지의 자발적인 영상을 내려달라는 교수님 여직원분께 신신당부드렸고 그이후 전화도 아서제가 댓글을 남겻습니다만 결국 제부탁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이순간부터는 교수님과 저는 적입니다. 그리고 고수님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지옥이란 끝나질 않는 퍼즐을 맞추며 갈것입니다. 아마 살아생전 가장 치옥적인 순간이 도래될것을 제가 장담합니다. 세상엔 민 형사상만 존재하질 안는다는것도 명심하십시요. 교수님께서 지성의우파라고 자처하는 모습을보면 우리나라의 우파가 가야할길이 얼마니 험하고 먼 길인지모르겠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을 팔고 우파란 허울아래 이런 정신병자도 하질안을 거짓을 국민들께 전파시키고 또한 교수님 자신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기위해 학자로서의 쌍방의 말을 들어보지도 안고 언론의 기본인 균형을 완전상실하여 보도하는 작태는에 대하여 교수님의 인격에 극히실망했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여자분께(직원) 저희랑 만나서 최소한 우리 입장을 들어보시라고 전했습니다.결국 전화도 받질안고 상대방의 말을 단한마디도 경청하질안고 생방송에 대고 하고싶은말 다해버리면 속은 시원하실지는 몰라도 그말에 수십명의 피해자가 도굴범이 되었을때 그 허위사실유포에 대한 결과에 책임은 법만으로 되는것이 결코아니란것을 명심하십시요. 교수님께서 앞으로 말도 되질안는 사기꾼과의 손잡음에 있어 수십명의 피해자가 양산될것도 좋다고 각오하신것갔다고 판단합니다. 교수님께서 억울하게 만든 수십명의 피해자가 민형사 소송을 각자 진행할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좌우파 인터넷 방송에 이사실에 대하여 국민들께 알리겠습니다. 


당신께서 아시는 만큼이상의 좌우파를 망론하고 이사실의 진실이 밝혀졌는데도다시 부관참시하는 넋나간 교수님같은 분들덕에 문대통령님도, 김무성씨도 여러가지로 힘들것갔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께서는 손석희씨를 건드린 변희재씨보다 제가볼땐 훨씬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것입니다. 


이건 완전 100% 날조된 현실이며 완전 사기극을 현직대통령을 상대로 이런 정신나가지안았으면 해서는 안될짓을 한 당신이 앞으로 치뤄야할 댓가가 얼만큼 옥하게 돌아갈것인지 을 분명히 말합니다. 교수님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질안고 너무 억울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이런 행동은 교수님이 진정 대한민국의 우파를 대표한다면 개도 웃을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교수님 다시 회생불가한 치욕적인 인생의오점을 남기고 싶으시질 안으시면 최소한 양쪽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요. 철저히 한쪽말만 듣는 귀와 양심은 우파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란것도 명심하십시요..당신에게 좌파분들이 아무리 밉고 문대통령이 당신말처럼 아무리 악마같아도 이렇게 픽션을 팩트로 둔갑시켜 일방적인 생방송을 통해 내질러버리는 지성은 매개한 아마존 식인종도 하질않는 수법입니다


귀하를 걱정하는 많은 귀하의 우호세력에게 망신에 망신을 당하고 가족에 따돌림당하고 민형사상 모든책임을 질 각오가 되었다면 마음대로하시고 아니면 모든것을 원위치로 돌려놓아주싶시요. 추가적인 내용은 유튜브 댓글에 올려놨습니다 ,참고바랍니다."



부산 문현동 일제 어뢰공장 금도굴 사건에 대한 정충제 씨의 주장은 '픽션'인 반면 자신의 주장은 '팩트'이라는 것이 태평티브이 김일선 교수에게 보낸 백준흠 씨의 메일 핵심이다.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 만, 그것도 거짓인 것을 퍼트리는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을 '옥하게' 라는 북한사투리를 써가며 그는 한다. 만약 정충제씨가 거짓을 퍼트리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이며, 그리고 사죄해야 하는 것은 맞다. 바로 이러한 성격의 사죄를, 일개 유투버 스트리밍 방송이 아닌 언론 중재위의 조정을 받는, 그리고 현싯점에 '모략'과 '음해'를 받고 있는 뉴스 타운의 안정권 전략기획실장 앞에서 당시 취재 기자였으나 지금은 국장인 정성화씨가 고개를 숙여 공식적으로, 뉴스타운에 13억5천 만원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던 백준흠 씨 측에 2018년 6월 12일 행한다(오른쪽 사진). 비록 개인적인 사죄라고 곧 바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말이다. 당사자인 정충재씨는 최근에 재심을 청구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이 사건이 13억 5천 만원의 명예 훼손 건이 되는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이건 역설적으로 부산 문현동 금괴 도굴사건 배후에는 일반인으로서는 도저이 접근할 수 없는 어떤 배후, 곧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위장이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당시 정충제 씨와 비밀약정서를 주고 받은 미국 CIA 요원인 리챠드 P. 롤리스(Lawless)는 헨리 키신저와 비밀 회담을 한다: "롤리스는 한국에서 헬기로 부산한 제7부두 일대를 한 시간 동안 비밀 촬영한 테이프를 갖고 미 국무성의 통제된 방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고 했다. 참석했던 맴버는 총 열세 명으로, 헨리키신저 전 국무장광, 주미 중국대사를 지닌 분 등 고위 관리를 비롯하여 스위스의 보석상 두 명도 자문에 응했다는 것이다."(정충제, 실화 황금백합작전, 81~82쪽). 태평 TV에서는 그 정점에 헨리 키신저, 오바마, 힐러리, 시진핑, 김정은, 문제인, 홍석현, 손석현 등 등이 있다고 주장 한다. 그렇다면 뉴스타운 정 국장의 저 사과는 언듯 백준흠 씨 측에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 노무현과 현재의 문제인을 거쳐 김정은 등을 통과하여 키신저에게 하는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서인지 뉴스타운 측에서는 고개숙이는 모습을 삭제한다.





위 메일에서 백준흠 씨는 관련 유투브 영상에 달린 자신이 쓴 댓글을 보라고 김일선 교수에게 충고한다. 문제의 댓글을 아래와 같다(출처 태평닷컴 클릭!):

" 6월 1일 방영 유튜브 영상 아래 백준흠씨의 덧글:  
김일선 교수님 귀하께서 방송하신것을 보고 반론을 합니다.그리고 이방송을 시청하신여러분 이런 정신나간 자가 100% 날조한 허위사실에 대하여 이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교수님 진실을 원하신다면 쌍방의 말을 들어보시고 해도늦지안습니다. 
    똑같은 우파방송 뉴스타운 손상운대표도 정충제에 속아서 신문에 장문을 게제한사실이있었습니다만 저와 만나신후 오해하셨다며 언론중제위에서도 기자를보내 사과하셨고 제가 아래와같이 북부지검역시 정충제를 고소한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경석목사님도 그자에게 속아서 그를 검찰총장께도 소게시킨바있지만 허위사실을 직시하시고 그와 완전 손을 띠었습니다. 
    김교수님 이사건은 노무현정부시절 오히려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제인 실장이 경찰청 특수수사대에 하명사건을 내려서 우리들이 수개월 내사를 받고 무죄로 끝나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정충제는 아래와같이 허위사실을 유포한 관계로 북부지검에서 기소중지 상태일 것입니다. 매번 경찰과 검찰을 피해 도망다니며 공상소설같은 시나리오를 만들어 국민을 현혹시키기에 이번에도 민형사상 소송을 들어갑니다. 
    교수님께서 상식이있는 분이시라면 현직대통령이 아무리 미워도 그분이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면 당사자를 만나 확인을 해봐야 상식아닙니까. 이런식으로 공상소설같은 방송을 하셔서 범죄자는 영웅을만들고 피해자는 도굴범으로 만드신다면 이건아니시라고 생각합니다 . 부탁드리건데 우파매체가 아무리 대통령이 밉기로서니 없는것도 있다고 한다면 터무니없는 사기 전문방송으로 전락할수밖에 없을것입니다.

갑자기 변희제씨가 생각이납니다. 

당장 인터뷰 동영상을 내려주시고 오늘 중으로 안내리시면 다음결과는 제가 검찰에 직접가서 명예훼손에 대하여 두사람을 고소하겠습니다. 이에따른 민사소송도 법무법인 한결대표변호사에게 조치하였습니다.아직도 늦지안았습니다. 지성인이사라면 , 사회정의를 부르짓는 분이라면 양쪽의견을 경청하고 인터뷰를 해야된다고 초등생도 1`분만 가르치면 아는일 입니다. 
    정충제가 무려16년간 우리를 괴롭혀왔던 흔적에 아래와 같이 일부를 적시합니다. 그리고 뉴스타운 보도시 북부지검에 고소했던 소장도 올립니다.

0.뉴스타운에의 명예훼손과 허위사실유포 (2016.1.27 및 2월15일)2부작 
1.정충제블러그에서 발췌한문건의 명예훼손과 허위사실유포 
2.SBS궁금한이야기Y에서 발췌한 영상20분 (2016.1.8.) 
3.일요신문에 게재된 정충제의 사기기사(2016.1.27.) 
4.주간경향에서 게재된 정충제의 사주로 판단되는 친동생 정성재의 문제인국회의원 사무실 인질극기사(2015.12.30) 5.뉴민주인터넷신문에 게재된 정충제의 사기극기사(2015.5.21) 
6.부산지검 동부지청 서범준검사의 공소장(2005.9.15) 
7.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박종훈판사 판결(2006.2.6) 
8.정충제와 공모한 김성식의 사실 확인각서 
9.정충제에 속아서 검찰총장을 소개하여 재조사를하게 정충제에게 협조한 서경석 목사의 약정서 및 서목사가 경영하는 업코리아 인터넷 신문에 연재된 명예회손 문서 
10.오보를 낸 인터넷신문 뉴시스의 사회부장이쓴 자필 확인서 
11.경제풍월에 게재된 정충제의 사기극 기사(2013.11월호) 
12.경제풍월에 게재된 고소인들의 반박기가 (2013.12월호) 
13.주간한국에 게재된 정충재의 사기극 기사(2013.5.17) 
14.시사저널에 발표한 정충제의 사기극과 협박문서(2013.6.20) 
15.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에 게재된 사기극기사(2012.7.22) 
16.전남매일에 게재된 정충제의 사기극 희생자에 관련기사 (2002.8.8) 
17.정충제가 출판한 실화 황금백합작전 서적 허위사실 발췌본 
18.사건처분통지서등(매번 경찰이나 검찰의 출두를 명할시 3년 이상을 거주를 바꿔 도망 다니다 2번이나 긴급 체포 되 었음) "


위, 장문의 덧글에서 내 눈에 번쩍하면서 걸리는 부분은, 짧지만,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당신께서는 손석희씨를 건드린 변희재씨보다 제가볼땐 훨씬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것입니다.' 변희재가 구속된 것은 손석희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석희는 누구인가? 탄핵내란의 '스모킹 건'(손석희 자신의 표현임)이 된 테블릿 피시를 조작한 장본인 아닌가? 그러나 검찰은 조작 테블릿 피시를 밝혀낸 변희재를 구속시켰는데, 그 구속사유는 다음과 같다: ‘범죄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으며 피해자 측에 대한 위해(危害) 가능성 등을 종합해 볼 때 구속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였다' 이 구속 사유에 대해 KBS 전 강영규 이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관련기사 클릭!): 

" 명예훼손 사건에서 증거인멸의 염려는 사실상 없고, 한국 전체를 뒤흔든 태블릿PC에 의혹은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 유일한 구속 사유는 위해 가능성이라는 것인데, 강 전 이사는 자신이 경험한 언론노조의 그악스러운 패악질 집회를 떠올린 것. 
    강 전 이사는 “방송장악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몇몇 KBS와 MBC의 이사들이 당한 폭력과 협박에 비하면 변대표의 스토킹은 애교에 속한다”며 “기록을 위해 필자와 몇몇 이사들이 당한 케이스를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겠다”고 서두를 꺼냈다. 
    강 전 이사에 따르면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는 기존 경영진을 내쫓기 위해, 불법파업과 스토킹, 공개망신주기, 가족 사진들고 탐문취재, 민간인 사찰, 집단폭행과 몸싸움, 직장 출입 방해 등 상상을 초월한다. ...... 강 전 이사는 “상황이 이런데도 변희재 대표의 구속을 강행하는 무리수를 두는 것은 결국 ‘정권의 언론 재갈 물리기’라는 평가를 면하기 힘들다”면서 “변대표는 구속 상태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 이어 “나는 탄핵정국 이후 변대표의 정치적 입장과 행보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변대표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구속 사유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며 “이런 비이성적 절차에 눈 감는다면 다음 피해자는 당신과 나와 같은 일반인들도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10) 재심을 청구하는 정충제(목차 클릭!)
자신의 댓글에서 백준흠 씨는 '손석희씨를 건드린 변희재씨보다 제가볼땐 훨씬더 가혹한 형벌'이 자신을 건드린 정충재 씨와 김일선 씨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만 한다. 손석희 뒤에는 홍석현이 있고, 그 뒤에는 오바마 키신저까지에 이르는 일루미나티들이 있어서, 이들이 김정은과 문제인과 시진핑을 조정하여 탄핵내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문제인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손석희는 문제인과 노무현의 '방계'인 반면에 자신은 이들의 '직계'이므로, 자신을 건드린 당신은 손석희를 건드린 변희재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자신을 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정충제 씨는 '직계' 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백준흠 씨 측의 배후에는 노무현이 있어서, 노무현의 검찰이 자신을 구속시켰으며 노무현의 판사가 '공소장과 한 자도 틀리지 않는 판결문을 통해서 자신을 44개월 감방에 처 넣었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저는 2005년9월6일 부산동부지청 서범준이란 애송이 검사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시작했고 무려44개월이나 징역을 살았습니다. 판결문을 보면 그 재판이 얼마나 ''개판'' 이었는가 잘 말해 줍니다. 검사 서 범준의 공소장은 제 맘대로 완전 창작해 낸 소설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판사 박종훈의 판결문입니다. 공소장과 판결문이 한자도 틀리지 않고 꼭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합니까? 미리 각본을 짜놓고 그 틀에 맞춰 억지징역을 살린것 입니다. "(중국에서 2012.02.23일 문제인 대통령후보에게 쓴 글, 출처 클릭!). 2018년 6월 10일 유투브 태평티브이에 출연해서 정충제 씨는 최근에 재심을 청구했다고 한다: 



손석희의 명예를 훼손 했다고 변희재도 구속됐으니, 만약 태평 티브이의 관련 동영상들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킨 당신들은 즉각 구속되어 변희재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을 받도록, 명예 훼손 죄로 구속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한 쪽은 재심을 청구했고 한 쪽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고 했으니, 법정에서 이제는 '진검승부'인 제2차 전이 벌어질 것 같다. 그러나 재판정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인다. 검사와 판사 모두 이전보다 훨씬 더 정치적일 것으니 말이다. '열기구 협회'에서 20년 '동락'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백준흠 씨 그리고 고 노무현 비서실장이면서 동시에 정충제 씨에 의해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단의 배후로 지목되는 문제인 현 대통령의 검사와 판사들이기 때문이다. 취임식 직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래 영상에서 확인 되듯이 김영정 검사로부터부산지검 동부지청에 왜 전화청탁을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참여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2003년 3월에 받는다. "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열린 '검사와의 대화'에 참석했던 검사들이 검사장 승진 인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 관련기사 클릭! )다.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100일이 못 되어 검사 복을 벗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부산지점 동부지청 501호 서범준 검사가 옆 방의 뇌물검사 김강준으로부터 문현동 금도굴에 관한 윗 선 수사 지휘를 받고 있었다고 당사자인 정충제 씨는 유투브 태평티브이 김선일 교수와의 인터뷰 영상에서 증언한다:


당시동부지청에서는 부산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단과 관련해서 고 노무현 씨가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으로 담당 검사에게 '금도굴하는데 노타지하라고, 타치하지 마라고' 전화걸었었다는 사실이 다 알려졌다고 그 영상에서 아래처럼 주장한다:


이로부터 2년 여 뒤인 2005년 9월 6일 저녁 아홉 시 경, 부산지검 동부 지청 수사관들에 의해서 정충제씨는 긴급체포된다: " 2005년 9월 6일 저녁 아홉 시경, 서울 신림동의 아파트로 귀가할 때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갑자기 네 명의 청년들이 귀에서 달려들어 두 명은 양팔을 꼼짝 못하게 붙잡았다. '당신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야?' '우린 부산 지검 동부 지청 수사관입니다. 정충제 씨를 사기와 무고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부산까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에 이미 20 여 년 동안 '열기구 협회'에서 고 노무현 의원은 2년 여 뒤의 부산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단 두목 백준흠 씨와, 2001년도에 한 사람은 태평양 열기구 횡단 추진위원장(노무현)으로서 다른 한 사람은 총괄본부장(백준흠)으로서, 서로 20년 동안이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라고 정충제 씨는 위의 인터뷰에서 말한다:



열기구협회 홈페이지↑




고노무현과 백준흠의 이름들이 가리켜진다↑

나아가서 정충제씨는 2012년(?) 3월27일 중국에서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글(출처 클릭!)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원이 문현동에 개입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뜻밖에도 국정원에 안전과장이란 사람이 포착되었습니다. 일개 평범한 국민이 국정원에 안전과장이란 직책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안전과장이 뭐하는 자리냐? 알아보니 국정원 소속에 시설이나 장비따위를 관리하는 부서랍니다. 김민수(48년생)라는 자가 안전과장인데 전라도 광주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자가 관리하는 안가에서 두목 백준흠을 보호해 준다는것도 알았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호해주고, 위치추적기 까지 달아주었다지요. 그외 또 해준것이 뭡니까? 두목 백가놈이 입이싸서 나불거렸기때문에 그 말이 제귀에 들렸습니다. 확인해 보니 틀림 없었습니다.
    가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의 책, '실화 황금백합작전'에서는 국정원 안정과장의 이름이 '김민수'가 아닌 '김영수'로 나온다: "이때쯤 백준흠(명)은 당시 정라도 말을 쓰는 국정원 안전과장 김영수 등 직원 서너명과 서울 강남구청 부근 유흥주점 '터널'에서 수시로 만나 최고급 술을 마시며 문현동 현장 촬영 테이프를 돌려 보고 자주 어울렸다. 백은 그들에게 중국의 보물급 도자기를 선물로 주는 등 문현동 현장의 보물 처리에 관해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며, 그 때마다 화제는 온통 금에 대한 얘기들로 떠들썩 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날은 국정원의 안가에서 자고 나왔다는 자랑을 하기도 했다는 증인(터널 사장 한미순)의 목격담 녹취록도 있다. 왜 그곳에서 자고 나왔느냐고 물으면, 납치 당할까 봐 그랬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스스로 납치를 걱정할 정도의 범죄를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백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중대한 범죄에 조직적으로 가담한 셈이 된다. 고위 권력층 누군가가 백준명의 뒤를 봐주고 이익을 챙기는 집단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은가."(196~197쪽)
    정충제 씨는 2018년 6월 3일 태평티브이와의 인터뷰에서 이와같은 사실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확인시켜준다:


따라서, 정충제 씨에 따르면 백준흠 씨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20년가까지 비록 열기구협회를 통해서였지만 지니고 있었기에 이 친분이 문현동 금도굴에 있어서 아주 강한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 씨가 그 이전에 종로구 국회의원이었을 시절에 세 번 직접 정충제 씨로부터 문현동 어뢰공장 보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참 매력이 있는 얘기네요 ...... 최종적인 저의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정선생님 말씀을 듣고 첨엔 저도 적극 개입해 볼까 생각도 했었지요. 그런데 주변의 친한 친구들이 극구 만류하여 직접 이 일에 뛰어들을 수가 없을 것 같고요 다만 지금까지 정 선생님이 해 오신대로 계속 추진하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제가 도울수 있는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제게 정치 생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노무현이 보물을 찾다 실패했다는 소문이 퍼져 보십시오. 다들 '노무현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인 생명은 끝장입니다."(위엣책, 50 ...... 51쪽) 정치적으로 계산된 아주 치밀한 결론인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은 백준흠이 문현동 보불에 대해 알기 2년 전에 이미 문현동 보물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글월에 나온 고 노무현의 '친한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법무법인 '부산'의 대표직을 고 노무현으로부터 이어받은 문제인이 그 친구들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고 노무현의 '열기구 협회' 20년지기였던 백준흠을 문제인 현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르고 있었을까?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는 정충제 선생의 증언에 언급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고 노무현 씨가 법무법인 부산을 떠나 청와대로 올라 갔을 때 고 노무현 씨로부터 문제인 씨가 뒤를 이어 그 법무법인의 대표가 된 후에 정충제씨가 문제인 씨를 만나 문현동 보물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문제인 씨는 '버럭 역정'을 냈다고 2018년 6월 10일 태평티브이와의 인터뷰에서 증언한다:



2010년 1월 15일 발행한 자신의 책에서 정충제 씨는 '경찰청 특수 수사과 브리핑' 이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 경찰청 특수과는 경찰청장의 지휘를 받지 않고 청와대 민정 수석실의 지휘를 받는다고 했다. 즉, 오전에 청와대로 결재가 올라갔는데 민정 수석실 문전에서 잘렸다는 뜻이었다. 당시 민정 수석인 문재인을 설득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수소문 끝에 그의 동창인 연합뉴스의 조 모 국장을 소개 받아서 서류를 직접 문 수석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얼마 후에 말하기를, '문재인 수석이 문현동 사건에 대해 훤히 다 알고 있더라'며 돌아왔다. 일이 또 용두사미처럼 끝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노무현이 다 아는 사건이니 같은 부산 사람으로 오랜 민주화 운동 동지인 문재인이 그걸 모를 리 없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위엣책 196쪽)


12) 문현동 어뢰공장 보물의 땅 주인(목차 클릭!)

이로서 우리는 정충제 선생의 진술을 통해서 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제인 현 대통령은 부산 문현동 일제 어뢰공장 보물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문현동 금도굴사건의 '두목' 백준흠씨와 이 두 대통령 사이의 직간접적인 관계도 밝혀졌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수반인 대통령의 사적인 개입은 보물이 묻힌 문현동 그 땅의 소유자가 일제(1945년 7월 3일, 위엣책, 26쪽)에서 개인(거창기업, 1219-1번지)과 대한민국 정부(거창기업에 동쪽으로 인접한 땅, 산162번지)으로 바꼈다는 공개적인 증빙서류(2018년6월6일 현재, 출처: 온나라부동산정보 클릭!)에서 밝혀진다.



소화 20년 7월 3일 소유권이 초선총독부로 이전됐음을 확인하는 등기부등본↑(위엣책, 27쪽)






2018년6월 현재, 문현동 어뢰공장 금도굴 현장 땅은 '위장회사'인 거창기업을 빼곤 죄다 나라 땅이다 ↑



13) 문현동 지하 어뢰공장에 수장된 조선인 강제징용인 1000 여명의 유골(목차 클릭!)

어뢰공장 수평굴 촬영 영상들에서 정충재는 지하 어뢰공장 건축에 투입된 조선인 1000 여 명의 유골들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정충제씨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하여 문현동 지하 어뢰공장 기지를 건설한 후에 생매장 당한 조선인들의 유골이 그 수평굴 출구에 수북하게 쌓여있었다는 것을 김성태 법정 진술 때 비로서 알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2018년 6월 7일 정충제 선생이 태평티브이 유투브 생방송에서 '유골'에 관한 말은 자신이 지어 낸 것이 아니라 재판 기록으로 남아 있는 법정 진술이라고 증언한 내용을 들어 보자:



정충채 씨 측의 1심 반대 신문 도중, 그럼 왜 굿을 했냐, 고사를 지냈냐는 질문에 "일제시대 때 끌려와 희생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라는 법정 진술이 나왔다고 한다: " 재판할 적에  ....... 판사가 법정구속시킬 수도 있으니까 ... 놀래 가지고 자기네들로 봐서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것입니다.  ...... 근데 그게 활자로 재판기록에 딱 찍혀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녜요. "  이 곳 지하 어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일제시대 때 끌려와 희생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골들로 어뢰기지 안에 수장된 이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므로서 금도굴을 무사히 마치기 위해 '서울에서 유명한 무당들 10' 여명을 불러다가 2002년 5월 28일 굿(아래 사진)을 했다는 것이 재판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 천여 명이 3교대 밤 낮으로 굴을 팠는데, 이 천 여명 중 대구경북 출신이 54명'이며 그리고  유골이 수중에 '수북이 쌓여 있는'(실행시간 21분 43초) 곳은 어뢰공장 출구라고 하는 정충제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 






서울에서 내려온 유명한 무당 10여 명이 했다는 이 굿에는 '당시 청와대 여성 담당 비서관이던 신미균'과 '당시 서울 경찰청 차장인 김기영 치안감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142쪽). 그리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15년 10일 27일 오전 11시 부산 남구 문현동1219-1번지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한국 유족회 중앙회'가 주관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추모 위령제'에서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수 많은 영령들 앞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빈다" 라고 추모한 바 있다(관련기사 클릭!). 경향신문의 김종묵 기자도 '광복직전 부산 문현동 조선인 노무자 1,000명 일본군에 학살당해 매장' 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 12월 11일에 관련기사를 낸 바 있다(관련기사 클릭!)




정충제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유가족 협회와 일제 강제 연행 한국 생존자 협회 등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 관련 단체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그들은 광복 직전인 1945년도에 부산 문현동에서 조선인 노무자 1,000여 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소문의 진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일제 강제 연행 한국 생존자 협회가 2003년 작고한 당시 노무자 진동식씨(우측사진: 일제강제연행한국생존자협회 가입원서)의 부인 권봉술 씨가 작성한 사실 진술서 역시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의 남편 진씨는 1942년 강제로 징용 당한 뒤 경남 진해의 해군부를 거쳐 현재의 거창산업 부지인 문현동 1219번지로 추정되는 야트막한 산 밑의 장소에서 일제 어뢰 공장 건설 발파 기술자로 2년간 일했다고 밝혔다. 권씨는 진술서에서, 남편은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굴 파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장소는 한쪽에 바다가 있고 다른 한쪽에 낮은 산이 있는 지하 공장이었으며, 남편이 말한 일본군 지하 공장이 있던 곳이 바로 문현동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또한 이민복(당시 60세, 서울 도봉구 미아3동 거주) 노인이 1989년 1월, 부산 우정관 여관에서 박수웅에게 증언한 바를 그대로 인용 해 보면 '(전략) ...... 나는 일본 해군 소년단에 입단하여 일본인 소년 다섯 명이 포함된 일곱 명이 한 반이 되어 일본 해군 구축함 승무원이 되었다. 1943년부터 1945년 초여름까지 부산 내항 동천 하류에 설치해놓은 시메트 부두와 나무 부두에 세 번이나 접안하여 어뢰, 폭뢰, 실탄 등을 선적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실을 그대로 증언한다. 구축함이 부산 내해에 진입할 때면, 어련히 선내 방송을 한다. 모든 수병들은 우현을 주시하지 말 것과 부두에 접안하면 누구든 하선해서는 안 된다는 방송을 되풀이한다. 전함이 부두에 접안하면 철로 거너편 절벽 아래에서 100여 명의 군인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하고 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사다리 같은 조립식 철로를 일제히 들고 나와 부두까지 삽시간에 연결하면 곧장 손수레를 줄줄이 밀고 나오는데 한 수레에 어뢰는 두 개, 폭뢰는 네 개, 실탄 박스는 여남은 개를 이삼십 분 될까 말까 한 시간에 민첩하게 처리하여 일이 끝나면 구축함은 지체 없이 부두를 이탈하는데 조립식 철도는 어디에 감추는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더라.

    당시 절벽 주변에 가옥이나 공장 같은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다만 절벽 밑에 국방색 천막 하나가 철로 변에 심어 놓은 나무 숲 사이로 간신히 보이더라. 1945년 초여름으로 기억되는데 미군과 대 해전을 앞두고 있을 때인지 몰라도 어린 소년단까지 수장시킬 수 없다며 해체, 귀가 조치시키더라. 나는 1989년 1월 10일 박수웅의 안내로 부산에 내려가 40여 년 전 구축함이 정박했던 그 해역에 당도해 보니 나무 부두 상판은 없어졌고 교각 몇 개가  아직도 바닷물에 박혀 있더라. 

1989년 1월 11일 부산 우정장 여관에서.


또한 윤우택(당시 73세, 서울 방배동 거주) 노인이 1990년 4월 18일 일제 강점기에 들었던 소문을 전해 준 바에 의하면, '(중략) ......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종일 굴 파는 일만 하고 일몰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올 때도 검은 천 눈가리 개를 채워 아침에 모였던 헌병대 마당에 도착해야만 눈가리 개를 풀라고 하고 내일 아침 일찍 일하러 오란다. 날마다 그 짓을 하고 일하러 다니니 어디서 일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존자 협회의 선태수 회장도, '진동식 씨 이외에도 일본군의 어뢰공장 노무자 집단 학살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이 여러 건 접수돼 있다.'면서, '당시 어뢰 공장의 실체를 파악하는 작업은, 일본군에 의한 집단학살 만행을 확인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불쌍한 유족들의 한을 푸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26~31쪽)


정충재가 구속수감된 이후에 역시 백준흠도 태평양전쟁희생자유가족협회와 접촉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백준흠은 2008년 말부터 서너차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옥 회장을 찾아가 '자신이 부산시 남구 국립 부경대 근처에서 지하를 오랫동안 탐사하고 있다면서, 일제가 건설한 것으로 보이는 지하 공간을 찾아냈으니 협조해 달라고 부탁하'(302쪽)였기 때문이다.



14) 끝내기: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과 위장이슬람(목차 클릭!)

교토프로젝트라는 '비밀약정'(위엣책 66쪽)을 리차드 P. 롤리스(일루미나티, 당시 미 국방부 동 아시아 태평양 담당 부 차관보, Richard P. Lawless)와 맺은 후에, '우연'(위엣책, 68쪽)히 삼천포 출신의 김성태(준)를 '부산 조방 앞의 금은방으로 번잡한 골목길'(위엣곳)에서 만난 그에게, 운명은 요동쳤고 그리고 늘 우연을 가장하고 있는 필연처럼 운명 그것은 정충제에게 잔인했다. 필연적인 것에는 욕심과 욕망이 따라붙는다. 일루미나티가 숭배하는 루시퍼는 사람 안에 욕망과 욕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리차드 P. 롤리스의 일루미나티는 김대중, 전두환,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김정은, 김정일, 김일성에로 이어지고,  문세광에서 탄핵까지 .... 

그리고 땅굴! 바로 이 땅굴광장(어뢰공장) 때문에 지금의 내가 글을 쓰고 있다. 

키신저를 문현동 일제 어뢰공장 금 도굴단의 배후로 지목하는 태평TV는 내가 보기에 맞고도 정확하다. 물론 '키신저' 라는 이름 자체는 어떤 테크니컬한 의미를, 오바마나 오사마처럼 지닌다. 변희재를 가둔 이들 일루미나티는 이제 태평TV를 가두려고 시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금의 금도굴단을 통해 그 덫을 놓고 있다. 만약 변희재가 태평과 연대하지 않고 '키신저' 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어도 옥에 갇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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