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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남의 철의삼각지(시더 폴, 장거리 땅굴파괴 작전 1967년 1월8~26일), 3-1)땅굴 수색과 파괴 

9)철의삼각지, 위장단거리땅굴 9호선(소위 철원제2땅굴) 

10) 결어.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는 6.25사변(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지역으로서 그 축이 되는 세 곳을 이어가면 삼각형 모양이 나온다. 한국의 철의삼각지에서는 양쪽이 비겼기 때문에 그 상태로 휴전 중이며(그러나, 2013년03월11일 김정은이 일방적으로 정전협정백지화를 선언했기 때문에, 휴전이 아니라 전쟁 중이다), 월남의 철의삼각지에서는 공산군이 이겼기 때문에 결국 베트남은 적화됐다. 그래서 월남전과 한국전에서 철의삼각지는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월남의 철의삼각지 지하에는 장거리 땅굴들이 군락(群落, complex)을 이루며 수백 마일 얽혀있었다. 한국의 철의삼각지 역시 이에 못지않다. 지상의 전선 두 배 길이의 땅굴이 그 지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6.25 전쟁 당시에는 월남의 그곳 보다는 적고 짧은 땅굴들이 얽혀 있었지만, 지금에는 아마 장거리땅굴들이 월남의 그 삼각지처럼 심지어 수도 서울 땅 쏙까지 연이어 얽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철의 삼각지 전투들 중에서도 백마고지 전투 못지 않게 아주 치열했던 그래서 피아간에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들 냈던 삼각고지전투의 땅굴전쟁에서 생존한 중공군 중대장의 증언(수기, 手記)을 번역 한 후, 월남의 철의삼각지에서 펼처진 시더 폴(Sedar Fall) 작전에서 장거리 땅굴들을 어떻게 수색하여 파괴시켰는 가에 관한 미군 장교의 증언(기록)을 번역할 것이다. 나는 군사 전문가도 아니며 그리고 이 두 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예전부터 모아 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베트남 전쟁과 6.25전쟁 기록 중 땅굴 전쟁에 관한 우리측 증언을 찾아 보기 어려웠다. 

번역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만약 미군과 국군이 공중을 지배하며 전쟁했다면 공산군은 땅속을 지배하며 전쟁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만약 앞으로 전면전이 발생한다면 역시 이와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공산군은 우리의 땅속 지하를 장악하여 월맹(과 베트콩)이 그랬던 것처럼 땅굴전쟁을 통해 한국을 적화통일하기 일보 직전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한국의 철의삼각지(Iron Triangle) 내(內) 삼각고지에서 벌어진 전투(1952년 10월14일~11월24일)에서의 땅굴전쟁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하자--바로 이 삼각고지전투와 나란히 ‘저격능선 전투’(The battle of sniper ridge)가 벌어지고 있었다.


2)한국의 철의삼각지: 삼각고지전투에서의 중공군의 땅굴작전(1952년10월16~18일) (목차 클릭!)



국군의 서울 재수복(1951년 03월 13일) 직후 퇴각하던 공산군이 반격을 위해 평강과 철원과 김화(금화)를 잇는 삼각지역으로 집결하여 깊이 6~9미터 내외의 땅굴을 파면서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던 그 해(1951년) 4월, 미8군 사령관에 취임했던 제임스 반 플리트(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적이 전선을 사수하려는 철의 삼각지(Iron Triangel)를 무너뜨려야 한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에서 ‘철의 삼각지’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당시 철의삼각지는 공산군(중공군과 북괴군)에 의해 점령당했던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철의삼각지를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일진일퇴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다. 아래 동영상(↓)은 철의삼각지 전투 상황을 잘 압축 묘사한다. 그러나 미국인에 의해 제작된 이 영상에서는 땅굴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 만큼 땅굴은 유엔군과 국군에게 취약한 급소였으며 미지의 세계였다:




마찬가지로,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제8권(1975년) 394쪽에는 단 하나의 소제목에 아래와 같은 짤막한 동굴 관련 애매한 언급이 나올 뿐이다(11권으로 된 이 한국전쟁사의 다른 권들의 소제목들에서는 이런 언급 마져 없다):

“ 그런데 이번 (1952년 10월 17일 철의삼각지 내의 저격능선 전투)의 침습 양상을 보면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철수한지 2시간도 채 못되어 바로 진전(陳前)에 나타나는 바, 이는 전날 포로들의 진술과 같이 동굴속에서 불시로 출현하는 것으로 분석되었으며, 더구나 적은 전날밤에 중공 제45사단의 예비인 제134연대(장, 장신원 張信元)가 새로이 투입되었다고 하니 이번 공격은 그들의 동굴작전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바로 이 포로는 비록 제8중대는 아니라고 하더래도 중공군 제15군 제45사단 제134연대에 속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사 위 8권(396쪽)에서 정일권 중장의 제2사단 휘하 제17연대가 문제의 중공군 그 제134연대와 저격능선에서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어지는 중공군 장교의 수기에서도 자신들이 한국군 제2사단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제134연대 소속 제8중대장인 쩡양만(Zheng Yanman)의 삼각고지전투 땅굴전쟁 수기(한국전쟁의 소리들 Voices from the Korean War,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5년, p.173~184)를 나는 번역할 것이다. 우리의 적인 중공군 장교가 쓴 것이기에 나는 원문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지니도록, ‘에니미’(enemy)를 ‘적’이 아니라 ‘상대’로 번역했다. 아래의 제20장 제목과 서문은 그 책 편집자가 쓴 것이이며, 쩡양만 중대장의 수기는 20 장 서문에 이어 실린다.



2-1) “
제20장: 지하로 들어간 중공군 (목차 클릭!)

1951년 가을에 양측은 교착 상태에서 참호전을 시작하였다. 남은 전쟁기간 동안 전선은 실제로 거의 변하지 아니했다. 중공군은 이 기간에 자신들이 굴착했던 정교한 지하 땅굴시스템 방어선을 지키는 데에 집중했다. 중공군의 참호 방어와 그리고 땅굴 시스템은 1952년 10월 중순 갑작스런 유엔(UN)의 Kumhwa(금화 또는 김화, 金化) 공격에 의해 검증됐다.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2사단이 오성산에 포진해 있는 중공군 제15군을 향해 10월 14일에 격렬한 포격을 시작해서, 서구인들에게 (철의)삼각지로 알려진 두 곳의 작은 고지, 597.9고지와 537.7고지를 확보했다. 10월 16일 유엔의 공격은 능선의 중공군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땅굴로 들어가게 했다. 중대장 쩡양만의 대원들은 증원군으로 10월 18일 땅굴방어를 위해 합류했다. 한 달 이상 그의 중대원과 그리고 다른 중공군들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낮에는 유엔군이 중공군을 땅굴들 속으로 몰아넣는 공격을 했지만 밤에는 중공군이 재공격을 감행하여 자신들의 진지들을 회복했다. 단지 낮 동안에만 중공군은 자신들의 진지들을 잃었을 뿐이다. 그 삼각고지 전투는 곧 그 전쟁의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들 중의 하나로 변했다.


중대장 쩡양망(Captain Zheng Yanman)
중공군 제15군, 제45사단, 제134연대, 제8중대.

[[ 아래 사진들은 삼각고지 전투(와 저격능선전투) 직전의 피아 부대 배치도(한국전쟁사 제8권, 국방부, 1975년, 379쪽)와 그리고 이들 고지와 능선 구글 사진이다(츨처 클릭! ) 좌측 상단에 오성산(사각형)이 위치하고 있으며, 중간 좌측에 삼각고지군(群, 역삼각형)인 598고지 등이 보인다. 중공군 134연대 8중대장의 수기는 아마 바로 이 598고지 땅굴전투에 관한 것이다. ]]




1952년 10월 16일 우리의 연대들이 [[ 삼각고지군(群)을 이루는 ]] 597.9 고지와 537.7고지의 16 개 진지(position)들 중 14 곳이나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충격받았다. 하룻 동안의 방어에서 그 연대가 550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나의 제8중대는 597.9 고지 [[위 사진의 저격능성 좌측에 볼록 솟아 나온 고지]]를 방어하고 있는 제1중대의 증원군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대 브리핑에서 나는 나의 중대원들에게 200명이었던 제1중대이 부상자 포함 단지 이십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 중대에 충원된지 채 일주일도 안되는 24명의 신병들에게 겁주기 싫었다.

나는 그 미팅에서 나의 병사들에게 그 고지에서 했던 우리의 모든 땅굴 작업의 결과로 우리들은 아주 강한 방어 시스펨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것을 나는 아주 잘 확신시켰다. 과거 4달 동안 전선 방어진지와 나란히 우리는 교대로 땅굴 요새를 구축했다. 정교한 도구와 군수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는 작은 야삽들과 곡괭이들과 같은 그런 우리 자신들의 ‘휴대용’ 도구들에 대부분 의존했다. 일 주일 동안의 땅굴 작업 후, 우리의 도구들이 닳아지고 우리의 음식이 동 났을 때 (우리 중대는) 그 고지 안에서의 땅굴굴착을 계속 이어 갔던 다른 중대와 교체됐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군수품 조달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해서 작업 도구들과 음식들을 가지고 다른 교대를 위해 그 고지로 되 돌아 왔다. 보통, 각기 전투원들은 60 또는 70 파운드에 이르는 군수품을 가지고 왔다. 병참(logistical)업무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기를 원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군수품을 안전하게 우리 자신의 등에 메고 가야 한다고 느꼈다.

동굴 안 공간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는 바위들과 규질사암들을 제거하면서 그 고지 안을 파들어갔다. 지하 땅굴들을 비추이는 램프들이 없었기에 대신에 우리는 송진을 태웠다. 낮에는 햇빛이 안으로 비추이도록 깨진 유리(glass)들과 금속 파편들이 땅굴 입구에서 마찬가지로 사용됐다.

이때까지 우리 연대는 597.9 고지 안쪽에 지하 네트웍을 구축했다. 나는 세 그루 나무 모양의 땅굴 시스템들을 묘사하고 있는 지도 한 장을 가졌다. 지표면 아래 20 ~ 30 피트 [[6미터 ~ 9미터]] 쯔음에 길이 70 야드(yards, 약 64미터), 높이 5피트(약 1.6미터), 폭 4피트(약 1.3미터) 가량의, 나무 줄기 같은, 세 개의 본 땅굴들이 있었다. 본 땅굴 각 각은, 나무 가지들과 같은, 여러 방공호들과 저장고들을 지녔다. 나는 진지들을 가로질러 가면서 (본 땅굴의) 입구들과 그리고 어떻게 이 땅굴 네트웍이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들이 우리의 땅굴들을 가지고 있는 한, 고지를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 중대원들에게 말했다. 사실 나는 이것에 관해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땅굴로부터 결코 지상의 상대들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내 중대원들의 마음에 있는 어떤 의심들을 제거해서 높은 사기를 유지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중국 민담, 원숭이 왕(손오공) 이야기를 비유로 사용했다.

원숭이 왕 이라는 중국 민담은 미국에서의 슈퍼맨 이야기처럼 널리 퍼져있었다. ‘우리는 고지를 공격해서 내일 밤 땅굴들로 이동할 것이다’ 라고 브리핑 했다. ‘ 우리는 철 부채의 왕자, 그 괴물의 배속에서 그를 괴롭혔던 손오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위 안으로 들어 가서 우리가 원하는 어느 곳에서든 어느 때든 차고 두드리므로서 상대을 패퇴시킬 수 있다. 우리는 상대을 고지 아래로 몰아 낼 수 있다.” 그것은 중대원들에게 의미 있었다. 모두들 자신감이 결여되지 않는 사실적인 표현들과 목소리들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대장으로서의 나는 이것이 격렬한 전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은 날, 연대 지휘소에서의 지휘관 회의에서 연대장 유장화(liu Zhanhua)는 최후의 일 인까지 그 고지를 사수해 달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의 오성산 견고한 방어는 미국인을 판문점 협상 장소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10월 7일 미국인들은 한국 정전협상을 연기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협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 곧 남한을 위한 땅을 얻기 위한 지상 전투를 시도할 것이다. 중국군과 북한인민군이 과거 2년 동안 그것들을 위해 싸웠던 땅 1인치 피 한 방울 조차 우리는 잃을 수 없다. 우리가 고지를 우리 손으로 지킬 수 있는 한 그 고지는 북한에 속한다. 우리는 미국의 권리를 여기에서 반드시 정지시켜서 그들을 판문점으로 돌아가야 해야만 한다.’

10월 18일 밤에 우리 중대는 어둠 속에서 그 고지로 이동했다. 나는 말했다: ‘ 은폐하라. 상대와 조우하지 말라. ’ 나는 은밀히 이동하기를 확실히 원했다. 내 임무는 땅굴들 안에 있는 제1중대와 함께 이들 땅굴들을 우리 손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방어전이 될 것이다. 참호 속에 있는 적군을 공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2백명이 넘는 내 중대원들은 은밀히 그리고 천천히 그 고지로 기어갔다.

그 고지의 정상에 반 쯔음 이르렀을 때에 우리 부대가 멈췄다. 고지에 유령들이 보인다고 첨병들이 보고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참호 안에서 잠자고 있는 흑인 미군들이었다. 우리의 신병들은 이전에 결코 흑인을 본 적이 없었다. 상대 진지를 포복으로 우회할 때 우리는 심지어 미군의 코 고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 고지 정상에서 부대는 다시 정지했다.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우리의 지하 땅굴들 입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틀 동안의 격렬한 포격과 육박전은 그 고지에 해 놓은 거의 모든 표지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내 지도는 아무 효력이 없었으며, 그리고 우리는 땅굴 안에 있는 우리의 전우들과 연락 할 수 없었다. 새벽 동틀 때까지는 약 한 시간 남짓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는 되 돌아서 그 고지에서 내려 가 안전하게 철수 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만약 동트기 전에 땅굴들 안으로 우리가 이동 할 수 없다면 나의 2백명은 상대 포격의 손 쉬운 타깃이 될 것이다. ‘ 겁 먹지 말라. 흩어져서 땅굴 입구를 찾아라.’ 라고 나는 나의 부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연히 땅굴들의 새로운 입구를을 발견했다. 우리의 병사들 중의 하나가 입구를 찾다가 깊은 포탄 구멍으로 떨어졌는데, 그 구멍 밑 바닥에서 여러 개의 손들이 갑자기 그를 나꾸어 채면서 그의 다리를 잡아 당겼다. 그러면서 그의 눈들을 덮고, 그의 소총을 빼았앗다. ‘기다려! 쏘지마!’ 그는 중국어로 외쳤다. 그의 눈들을 덮고 있던 손들이 곧 떼어졌다. 그는 땅굴들의 새로운, 은폐된 입구에서 여러 명의 제1중대원들 사이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입구에로의 길을 표시하기 위해 미숫가루 사용하라고 했다. 동트기 전에 (낙오자 2명을 제외한) 제8중대원 전체가 사상자없이 땅굴들 안으로 이동했다.

사진(↑): 1951년, 중공군들이 그들의 지하 땅굴 작업을 하고 있다.( Courtesy of the Center for Archives and Information, Heilongjiang Provincial Academy of Social Sceinces). 


사진(↑): 지하 땅굴에서의 심각한 물 부족 때문에 한 중공군이 암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끈기있게 기다록 있다. ( Courtesy of the Center for Archives and Information, Heilongjiang Provincial Academy of Social Sceinces).

땅굴들 안 쪽은 커다란 혼란 덩어리였다. 첫째, 세 개의 땅굴들이 서로부터 잘려 나갔으며 그리고 땅굴들 사이에는 어떤 연결 또는 교통도 없었다. 각 땅굴은 10월 17일 상대의 공격들로부터 극심한 충격을 잆었다. 몸들, 포탄들, 그리고 음식 찌거기들이 곳 곳에 널려 있었다. 어떤 군수품도, 음식도,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물도 없었다. 당연히, 땅굴들 안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명령 체계도 없었으며, 땅굴들과 우리의 연대 지휘부 사이의 교신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고 그 누구도 무엇을 해야할지를 몰랐다. 여섯 다른 중대들로부터의 그리고 16세에서 52세에 걸친 생존자들, 약 1백여 명이 땅굴들 안에 있었다. 이들 중 약 50 여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이들은 어떤 약이나 치료도 받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가로질러 누워있었는데, 몇 몇은 죽어가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피 구멍들 중의 하나에 20구가 넘는 시체 무리가 있었다.

어느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후 첫 날 아침 땅굴들 안에는 일곱 번의 총기 사고와 두 번의 수류탄 사고가 있었다. 이들 사고에 의해서 내 중대원들 중 몇 몇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실로 미쳐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찌기, 나는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땅굴 안의 등불(candle) 주위에 앉은 지휘관 모두는 내 제안에 동의했다. 첫째, 우리는 반드시 명령체게를 새워야 한다. 나는 그 고지와 땅굴들 방어을 명했을 것이다. 비록 땅굴들 안에는 다른 생존 중대장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잣니들의 중대원 대부분을 잃었다. 예를들어 제1중대는 단지 여섯 명 만이 남았다. 라디오를 가지고 우리의 연대 지휘부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중대장은 나였다.

다음으로, 나는 부상자들을 고지 아래로 대답하게 내려 보내 우리의 후방지역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중상을 당하지 않는 자들에게 남을 것인지를 자발적으로 결정하라고 했다. 다음 이틀 밤 동안에 약 40 여명의 부상병이 없어졌다. 후에, 짐짓 부상 입은 척 하고 있는 대대 장교들과 몇 몇 사병들에게 밤에 고지를 떠날려 했었다는 것이 나에게 후에 알려졌다. 그 장교는 중국 PLA 군사법정에 세워졌으며 그리고 사병들은 즉결 집행됐다.

우리의 땅굴들을 낮에 안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밤에 상대의 지상 진지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 이런 결정은 그 고지에서의 나의 첫 이틀 동안의 지휘관으로서의 내 경험으로부터 내려졌다.

597.9 고지에서의 내 첫 지휘의 날인 10월 19일 오전 09:00 분 쯔음, 상대는 우리의 입구들 중의 두 개를 발견했다. 오후 1:00에 그들은 무반동 총과 기관총을 쏘며 그리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우리의 땅굴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S 자 모양’의 땅굴들로 인하여 그들의 화력으로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땅굴들 속으로 들어 오려고 했다. 우리의 작고 좁은 땅굴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는 입구 쪽으로 한 번에 세 명씩 만 보낼 수 있었다. 각 조는 단지 8 ~ 10 분 정도 만을 버텼다. 해질 무렵 공격들이 멈췄다. 우리는 49명이 죽고 17명이 부상당하는 등 많은 피해자를 냈다. 더구나 우리 땅굴들의 일부가 상대의 연속적인 포격 후에 무너졌다. 여러 명이 산채로 땅굴들 안에서 생매장 당했다.

우리의 병정들은 얼어 붙었다. 10월 19일 저녁 때에 이들 중 몇 몇이 나에게 불평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8중대는 결코 이런 류의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슈퍼 원숭이 왕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고지 안 쪽 올가미에 걸려있는 원숭이 같습니다. 상대들은 우리 머리 위를 이리 저리 걷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른 타격을 위해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다른 병정들은 그 고지에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지에 대해 의아해 했다. 3일, 아마 4일이 흘렀을까? 매일 더 많은 자들이 죽어 갔으며 그리고 우리의 땅굴들은 조각 조각 떼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연대장 류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해 걱정해서 나에게 그 고지에 증원군이 필요한지 아니면 다른 중대로 교체되야하는 지를 무전기로 물어 왔다. ‘더 이상의 사과들을 보내지 마십시요” 라고 나는 연대장에게 답했다. (우리의 무전기 암호로 사과들은 증원군을 의미한다). 우리의 땅굴들은 점점 더 짧아지고 그리고 더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더 많은 부대들을 담아 낼 수 없다. ‘제8중대 모두 좋다 우리는 사수할 수 있다.’ 땅굴들에 더 오래 머무르기 위해서 동일한 종류의 방어전술을 사용하면서 계속해서 더 많은 병정들을 희생하는 한, 새로운 교체 병력도 [[이 보다 더]]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우리의 땅굴들을 보호하기 위한 더 나은 길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밤중에, 나는 물과 정보를 얻기 위해 땅굴들 밖으로 두 팀을 내 보냈다. 나는 하사관들에게 ‘교전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 중 몇 몇은 어찌하다가 상대의 참호들로 달려 들어 갔고 총들이 발사됐다.

놀랍게도, 교전이 끝나자 마자 미군과 국군[[한국군]]이 자신들의 진지들을 떠나서 고지 밑으로 이동했다. 상대군이 밤중에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배우고 나서 나는 행복했다. 밤에 미국과 국군[[한국군]]은 항공지원과 포격지원을 받지 않았으며 그리고 아마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 쉽게 그 고지를 재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0월 20일 새로운 방어 계획이 떠 올랐다. 내 계획에 따르면, 밤에 우리는 땅굴들 밖으로 나와서 상대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이 후퇴하면 우리는 그들의 고지 진지들을 얻을 것이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상대의 재 공격까지는 그 진지들을 사수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함께 공격하는 것이 두 세 시간 걸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들의 공격이 시작됐을 때 우리는 땅굴들로 복귀하면 될 것이다. 상대군이 자신들의 지상 진지들을 사수하는 것은 오후 어느 싯점까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둡기 전까지 우리 땅굴 입구들을 발견하여서 우리 땅굴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준비를 할 때까지의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부대원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땅굴들도 낮 동안에 안전할 것이다. 나는 나의 새로운 방어 계획을 직접 연대 지휘부에 보고했다.

연대장 류는 나의 새로운 계획을 승인했으며 그리고 연대 박격포 중대가 상대 군의 한 낮 맞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포격을 할 것이라고 덧붙혔다. 45사단 지휘부에 그가 나의 계획을 보고 할 때 ‘공격적인 방어’ 계획이라고 이름붙혔다.

사진(↓): 중공제15군, 45사단, 제134연대원들이 1952년 10월, 597.9 고지 진지들을 방어하기 위해 땅굴들을 사용하고 있다. ( Courtesy of the Center for Archives and Information, Heilongjiang Provincial Academy of Social Sceinces).


사건들은 곧 나의 공격적인 방어 계획이 좋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입증했다. 10월 20일 야간에 나는 여섯 개의 팀더러 고지의 상대 진지들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그들이 공격했을 때, 제7사단 미군들과 그리고 제2사단 한국군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참호로부터 나와서 고지 아래로 이동했다. 약간의 사상자들을 내긴했으나 우리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597.9고지의 열 여섯 진지들 중 열 두 개 진지들을 획득했다. 나는 우리의 성공을 연대 지휘부에 보고했다. 연대장 류는 후에 나에게 사단 지휘부가 우리의 성공적인 ‘공격적 방어’ 전술을 10월 21일에 다른 연대들에게 도입했다고 말해줬다. [[중공군]] 제45사단은 첫 7 일 동안의 두 개 고지 방어전투에서 4천명 이상의 병사들을 잃었다. 우리의 땅굴 방어술을 증진시킴에 의해서 나의 공격적인 방어는 아마 많은 중공군의 생명을 건졌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10월 22일 우리의 전투 경험들은 나의 제안들을 지지했다. 상대는 자신들의 진지들을 서둘러 재탈환하려고들지 않았으며 오전 11:30까지는 맞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아침 대부분을 땅굴들 밖에서 입구를 보수하며 물을 저장하고 고지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보냈다. 우리 부대원들은 그 막간과 그리고 사일 동안 처음으로 햇빛을 즐겼다. 이들의 사기는 올라갔으며 그리고 지휘관들 역시 나의 새로운 전략에 흥분했다. 나의 부관들 중의 하나가 나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중대장님, 우리는 진지들에 더 가까지 은폐된 입구들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밤에 다시 이들 진진들을 우리가 쉽게 취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다른 부관이 말했다: ‘저기, 중대장님 벙커들 안 쪽으로 우리의 죽은 동료들을 묻어서 그들의 몸들이 포격과 폭격에 파괴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

오전 11:30분 경 상대의 포격이 시작됐다. 우리 모두는 땅굴들로 이동했다. 오후에 상대가 고지의 지상 진지들을 탈환했다. 오후 5:00 무렵, 그들은 우리의 입구들 중 둘을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은 우리의 땅굴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함께 시도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어둡기 전에 십 수 개의 수류탄들을 집어 던지고는 떠났다. 24시간 동안 우리는 단지 2 명이 전사했고 다섯 명이 부상 당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낮에 피비린내나는, 수동적인 방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우리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 부대는 더 나은 철수 준비를 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공격하자 마자 그들은 준비된 듯 모든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진지에서 나왔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좀 더 일찍 자신들의 고지 진지들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재차 그들은 우리의 땅굴들에 대한 어떤 공격도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3일째 되는 10월 24일 그들은 다시 동일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나 우리는 되돌아 오고 있는 군의 대부분은 단지 몇 몇의 미군들을 동반한 한국군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것을 연대 지휘부에 보고했다. 연대장 류는 한국군 제2사단이 이 597.9 고지의 주요 부대라고 믿었다. 우리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나에게 60 여명의 증원군을 보냈다. 어디에 편재된 군으로부터 병사들이 오는 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고지의 모든 중공군은 내 지휘 하에 있었다.

10월 25일, 고지 상황이 변했다. 한국군은 9 대의 야전탱크와 서치라이트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진지들로 돌아 왔다. 나는 그들이 오후 늦게나 또는 심지어 초저녁에 우리의 땅굴들을 공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군에게 땅굴 방어 준비를 명했다. 오후 8시까지 그러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우리는 우리의 야간 전투로 인하여 흥분하기 시작했다. 고지의 밤은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밤중에, 나는 상대 탱크들을 부수기 위해서 두 개의 폭파 팀을 보냄으로서 공격을 시작했다. 약 15분 후에 팀들 중의 하나가 어떤 폭파도 없이 돌아 왔다. 그들은 미군 탱크와 우리 탱크 모두가 큰 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탱크와 아군 탱크를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팀의 부관이 그들에게 화난 목소리 말했다: ‘우리는 고지에 어떤 탱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상대 탱크는 흰 별이고 우리는 붉은 것을 지닌다 가서 그것들을 포획하라’. 20분 후에 연달아서 폭발소리가 고지에서 들렸다. 9 대의 경탱크 중 5 대가 못쓰게 됐다.

‘상대 진지를 빼앗아라’ 나는 명령했다. 일곱 팀, 약 1백명의 부대원이 나의 부관들을 뒤 따라, 땅굴로부터 쏘다져 나왔다. 그들은 이전에 매일 밤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방쪽 지상 진지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상대는 철수하지 않았다. 모여서 철수하는 것 대신에 그들은 서치라이트들을 돌리면서 역공을 취해왔다. 어두운 고지가 상대의 불빛들과 포격 섬광에 의해서 갑자기 커다란 축구장처럼 환해졌다. 우리의 군사들은 모두 어떤 덮개나 보호막 없이 고지 위에 있었다.

상대의 기관총들과 4 대의 경전차가 밤에 처음으로 행해지는 포격 지원과 함께 불을 품었다. 우리의 공격대들은 각 상대 진지 전면에서 강한 방어에 직면했다. 두 개의 진지를 취한 후에 우리 부대는 더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후퇴!’ 라는 나의 목소리는 전쟁터의 고막터지는 소음으로 인하여 사라졌다.

한 시간 후에, 국군[[한국군]]은 두 진지 안의 우리 부대들을 포위하고서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나는 그들을 구조하기에 충분한 정신력이나 화력을 가지지 못했다. 새벽 2시 무렵에 전투는 끝났고 정적이 고지에 감돌았다. 1백명의 부대원 중 단지 17명 만이 싸우면서 땅굴들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나는 내 자신에게 화났다. 나의 잘못된 계산이 제8중 반 이상의 인명손실을 초래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고지 위 (제2사단, 31연대) 한국군은 우리의 땅굴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약 오전 11시경 한국군 병사들이 우리의 주 땅굴들 입구 중의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십 수 개의 수류탄들을 집어 넣어 터트리고는 우리를 그 입구로부터 멀어지도록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한 시간 후에 약 20여명의 한국군들이 땅굴들로 떨어지듯 들어 왔다. S자 형의 좁고 어두운 땅굴은 우리의 응사 거리를 제한했다. 우리의 병사들은 상대들이 아주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일 대 일 백병전이 벌어졌다. 나는 땅굴들 안 곳 곳에서 총소리 고함소리 비명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잘 조직된 땅굴 방어술 덕택에 우리는 37 명의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 땅굴들 안으로 들어 온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땅굴들 안의 우리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치우기 전에 한국군은 더 많은 병사들을 땅굴들 안으로 들여 보냈다. 내가 이제까지 봤던 것들 중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였다. 우리가 오후 5시까지 한국군의 두번째 공격을 그치게 하는 동안, 이내 곧 한국군들이 되 돌아 와서 땅굴안에 가스탄들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바위들과 그물철망으로 우리의 땅굴 입구를 봉쇄했다. 그들은 우리의 야습과 지상진지 공격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입구를 열어서 신선한 공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0월 26일 그 날이 다 할 무렵 나에게는 단지 16 명의 병사들만이 남았으며, 그리고 그들 중 단지 4명 만이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지에 머물렀다.

10월 27일 아침에 연대장 류는 597.9고지에 병력 160명 더 증원했다. 내 병사들을 준비시켜서11월 29일에 그 고지에서 나오라는 지시를 나는 연대 참모와의 교신에 의해 받았다. 제8중대는 다른 중대로 교체된다는 것이었다.

‘ 아닙니다! 나는 2개 중대의 정치 교관들, 여덟 명의 부관들, 나의 하사관들 모두, 그리고 거의 2백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직 여기에서 끝낼 수는 없습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 고지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나의 죽은 전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나는 무전기에 대고 소리질렀다.

연대 참모는 그것은 연대장 류의 명령이다 라고 나에게 말했다.

‘누구를 염려해주는 거지? 어떤 것도 나를 이 고지로부터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은 내가 전투에서 죽은 후에야 여기사 나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미쳐있었다 그리고 내 말을 누가 듣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사실, 연대장 류는 연대 지휘부 거기에 그 때 서 있었고 그리고 내가 무전기로 말했던 모든 것을 들었다. 그가 무전기 폰을 잡고 나에게 외쳤다: ‘쩡양만, 너 미쳤어? 나는 연대장 유장화이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내 명령에 불복하지? 준비하고 네 병사들을 끌고 내일 거기에서 나와!’

나는 내 불평들을 멈추었다. 우리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땅굴들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했고 그리고 12일 동안 그 고지에 머물러 있었다.

연대장 류의 명령에 따라 나는 10월 28일 밤에 제135연대로부터 온 한 부대장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그는 나에게 다음처럼 말했다: ‘ 쩡 중대장, 나는 모든 것을 들었네. 우리는 끝까지 이 땅굴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그리고 싸우겠네.’

10월 29일 야간에 제8중대는 땅굴들을 빠져나와 고지 아래로 이동했다. 나와 같이 다시 빠져 나와 그 고지 아래로 걸어 갈 수 있는 중대 병사들은 오직 6명 뿐이었다. 우리가 바로 12일 전에 그 고지 위로 이동했을 때, 2백 명의 젊은이들이 영웅적인 꿈들을 가지고 활기차게 달리며 뛰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이들 중 단지 여섯 명 만이 있었다. 피로에 지치고 부상당한 채 그들 6명은 천천히 언덕 아래로 이동했다. 먼지와 피로 뒤범벅이 된 채 그들의 얼굴들과 팔들은 석탄처럼 그을렸다. 이들의 제복은 꽤재재한 누더기로 변했으며 팔굼치까지 닮아 없어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걷고 있는 유령 같았다. 우리가 작은 웅덩이에 멈추어 섰을 때 나는 ‘네 얼굴을 씻어라’ 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다음처럼 말했다: ‘너는 패잔병처럼 끔찍해 보여. 우리는 새로운 제8중대의 씨앗들이다. 우리는 새로운 전우들을 환영할 것이고 그리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

나는 내 얼굴을 씻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있는 내 전우들의 친숙한 얼둘을 씻어 낼 수는 없었다. 나의 부관들, 하사관들, 그리고 병사들은 중공에서 한국까지 먼길을 나를 따라 왔다. 그들은 결코 그들의 고향들로 되 돌아 갈 수 없으며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볼 수 없다. 그들은 겨우 열 아홉 또는 스무 살 난 젊은이들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피를 이 이국 땅에 떨어 트렸다. 나는 나의 눈물을 그 웅덩이에 떨어트렸다.

연대 지휘소에서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여태껏 싸웠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들 중의 하나였다고 들었다. 제134연대는 자신의 대부분의 중대들을 잃었다. 그 연대는 자신의 중대장들 중 65%을 잃었으며, 자신의 부관들 중 89%을 잃었고, 그리고 자신의 하사관들 100%를 잃었다. 우리의 사단은 그 두 고지들에서 5,200 명을 잃었다. 제15군은 10월 하순부터 삼각고지 그 전투가 최종 끝났을 때인, 11월 초순까지 토탈 11,400 명의 사상자를 냈다. ”


중공군 제15군 제45사단 제134연대 제8중대장, 쩡양만의 위 증언은 6.25사변 때의 땅굴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 지를 확인 해 준다: “ (제2사단, 31연대) 한국군은 우리의 땅굴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약 오전 11시경 한국군 병사들이 우리의 주 땅굴들 입구 중의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십 수 개의 수류탄들을 집어 넣어 터트리고는 우리를 그 입구로부터 멀어지도록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 한 시간 후에 약 20여명의 한국군들이 땅굴들로 떨어지듯 들어 왔다. S자 형의 좁고 어두운 땅굴은 우리의 응사 거리를 제한했다. 우리의 병사들은 상대들이 아주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일 대 일 백병전이 벌어졌다. 나는 땅굴들 안 곳 곳에서 총소리 고함소리 비명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잘 조직된 땅굴 방어술 덕택에 우리는 37 명의 우리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 땅굴들 안으로 들어 온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땅굴들 안의 우리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치우기 전에 한국군은 더 많은 병사들을 땅굴들 안으로 들여 보냈다. 내가 이제까지 봤던 것들 중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였다. 우리가 오후 5시까지 한국군의 두번째 공격을 그치게 하는 동안, 이내 곧 한국군들이 되 돌아 와서 땅굴안에 가스탄들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바위들과 그물철망으로 우리의 땅굴 입구를 봉쇄했다. 그들은 우리의 야습과 지상진지 공격을 다시 하지 못하도록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입구를 열어서 신선한 공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0월 26일 그 날이 다 할 무렵 나에게는 단지 16 명의 병사들만이 남았으며, 그리고 그들 중 단지 4명 만이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손실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지에 머물렀다. ” (한국전쟁의 목소리들 Voices from the Korean War, The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5년, p.182~183).

이 얼마나 끔찍한 아비규환의 그러나 생생한 땅굴전쟁 증언인가! 서로 잡고 찔러 죽이는백병전이 벌어진 곳은 지상 참호가 아니라 8미터 지하에 있는 땅굴이었다. 어두운 땅굴에서의 백병전을 당신은 상상이라도 해 봤는가? 땅굴 안 백병전이 벌어진 곳은 철의 삼각지대 내의 김화(금화金化 Kumwha) 북쪽 인근 ‘삼각고지 전투’(The battle of triangle hills, 위의 책, 184쪽)였으며, 그 때는 1952년 10월 18 ~ 29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에 이렇게 치열한 땅굴전쟁을 우리 국군은 치루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22년이 지난 1974년 11월 15일 연천군 고랑포에서 제1땅굴 발견(11월15일)되는데, 이 연천 제1땅굴 수색 도중 북괴가 매설한 부비트랩을 건드려 국군장교1명과 미국장교1명 2명이 전사하고, 미국5명과 국군1명 등 6명이 부상당한다(11월20일). 땅굴 안에서 ‘전투’가 다시 발생 해 8명의 사상자가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다 그 땅굴 발견 당시 벌어진 남북간의 1시간 15분 전투에서 구장섭 중사 등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 당한 것을 합하면 도합 16명의 사상자가 땅굴전쟁과 관련하여 발생했다(출처 클릭!). 이처럼 우리는 지금도 땅굴전쟁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거리땅굴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면 당신은 전쟁공포증의 희생자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을 도와 나라를 붕괴시키는, 적과 내통하는 여적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38 년 여 동안 전방 땅굴 탐사를 해 온, 그리고 철원 제2땅굴 발견 공로로 인해 보국광국장(1975년4월30일)을 받은 이종창 신부님에 따르면, 철의 삼각지 내 바로 이 김화 오성산에서 시작하여 김화 장수대교와 고석정을 거쳐 동송에 이르는 (2008년 당시) 12Km의 장거리 땅굴 제10호선이 존재한다.
        이에 관해서는 이 글 말미에 알아 보기로 하고, 이제 월남의 철의삼각지대 장거리 땅굴 파괴 작전을 알아 보자.



3) 월남의 철의삼각지: Sedar Fall(시더 폴), 장거리 땅굴 파괴 작전 (목차 클릭!)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도 철의삼각지가 있다. 공통인 것은 그 곳 이름 모두 공산군과의 전쟁 와중에서 붙혀졌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괴군과 중공군과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월남의 경우에는 (중공과 소련과 북괴 등의 공산권 지원을 받는) 월맹과 베트콩과의 전쟁 소용돌이 속에서 철의삼가지 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러기에 남북이 갈리는 역사적 배경도 비슷하다. 월남(1945년, 남베트남)과 월맹(1945년, 북베트남)이 건국되기 전에, 철의삼각지 라고 후에 불리워지게 될 지역의 땅 속에 프랑스(1887~1945년)와 일본(1941~1945)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세력들에 의해서 땅굴들이 뚫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이들 세력들 중의 하나인 베트민(Viet minh, 공산주의 게릴라들) 등에 의해 땅굴들이 점차 길어져, 월맹과 월남 사이의 베트남 내전 도중에 구찌까지 연결 돼, 베트남 전쟁 때 그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철의삼각지 일부는 미군과 월남군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그 전체는 월남전이 끝날 때까지 베트콩 지역이었다. 바로 이 철의삼각지 땅굴들에로 공산군의 군수물자 보급로인 호지명(호치민, Ho Chi Minh) 루트의 남단 끝이 이어졌으며(아래 사진↓), 그리고 이 루트를 통해 구찌의 미군 베이스캠프와 베트남대통령궁 지하 땅굴들까지 군수물자가 보급됐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월남 안의 영토였지만 철의삼각지(와 그 땅굴들)을 장악하지 못하고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 동부접경 지대로 지나 구찌로 이어지는 호지명 루트를 폐쇄시기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 월남은 결국 베트남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위관장교로서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 블로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적이 월남 내부에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전쟁개념을 한정시켰기 때문에 이는 곧 월맹이 월남을 침공하여 제네바협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월남 및 연합국이 북폭을 계속 한다든지 월남국경을 넘어서 호지명 루트를 공격하면서 월맹 본토를 공격하는 명분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연합국을 전략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었다. 월남내부의 대게릴라전으로 월남전을 규정한 것은 자기발등을 찍는 모순을 가져왔다. 군사적인 전략전술면에서 실제 성격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것은 전체 전쟁과 국가안보에 큰 혼란을 초래했으며 시행 상 에 엄청난 혼동을 가져왔다. …… 여하튼 결정적인 목표에 결정적 공세행동을 취하지 못한 미국의 수세적인 방어 전략은 월맹에게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성역인 월맹 본토를 기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호지명 루트와 함께 외선작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끝내는 폭이 짧은 월남을 바다로 몰아넣을 수 있는 큰 잇점을 스스로 적에게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 ”(
출처클릭! )

수백 마일의 철의삼각지 땅굴들과 250 Km의 구찌땅굴들 그리고 이러한 땅굴들에 이어지는 보급로 호지명 루트를 봉쇄 파괴하지 못한 것이 월남 패망 원인들 중의 하나 라는 분석은 명쾌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오늘 날의 한국전쟁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을 기지로 하는 장거리남침지하땅굴들과 그 원점들을 봉쇄 파괴하지 않는 한, 북괴에 의한 남한의 적화는 그 시간의 차이만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 연합군이 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 번이나 철의삼각지 땅굴들을 파괴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철의삼각지는 오늘 날의 공산 베트남 빈 두옹(Binh Duong) 주에 속하는 그리고 서쪽으로는 사이공 강과 동쪽으로는 틴(Tinh) 강과 그리고 사이공 북쪽 약 25마일(40Km) 떨어진 13번 도로를 그 경계로 하여 위치하는, 그 면적이 31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밀림이 울창한 지역이다(아래 사진 ↓). 이 삼각지의 남쪽 끝은 빈 두옹 주도(州都)인 푸콩(Phu Cong)으로부터 7마일(11 Km)떨어져 있다. 사이공에 근접해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 철의삼각지는 미군과 월남군 그리고 공산군 이 양측의 치열한 접전지역이었다. 아래 지도는 시더 폴(Sedar Fall) 작전 당시의 철의삼각지이다:



이어지는 번역은 미군 철수 이전에 미 연합군에 의해 시도된 두 번째 작전 ‘Seder Fall’(1967년 1월8~26일) 때 전개된 땅굴파괴 작전의 번역이다. 글쓴이는 그 작전의 참모장이었던 웨스트워랜드(William C. Westmoreland)이다:


3-1) “ 땅굴 수색과 파괴. (목차 클릭!)

[[철의삼각지대의]] 적 전투부대들이 일반전으로 땅굴 시스템들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부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도 전투 진지들과 참호들과 그리고 보호 벙커들에 의존했다. 마을 부락민들과 촌장들(hamlet cadres)과 병참부대들과 그리고 지휘소와 같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베트콩 소부대원들이 땅굴을 팠다. 따라서, 땅굴들은 적이 지배하는 마을들과 병참기지지역들에서 아주 자주 발견됐다. 그러나 전투 베이스캠프에서 반드시 땅굴들이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정규베트콩 전투원들은 보통 그러한 땅굴들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귀환병들과 심문받은 포로들이 일러주었다. 이들은 자주 그 일반적인 위치를 일러주었다. 그러나 땅굴들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정보는 보통 지역 촌장들(cadres)과 후방부대원들로부터 왔다.

철의삼각지대 탄 디엔(Thanh Dien) 밀림지대에 대규모 땅굴망이 발견됐다. 시더 폴 작전은 인내야 말로 땅굴들 안에 숨은 적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우선적인 무기라는 것을 입증했다: 적의 군수품이 동 나기를 기다리거나 또는 적이 당신이 있는 곳에 대해 호기심 갖기를 기다리거나 또는 적이 움직이기를 기다려라! 어떤 때는 땅굴 공격조(Tunnel rats)로 하여금 적들을 땅굴 안에서 찾아 내거나 또는 내부 반란을 유도하거나 또는 땅굴들을 봉쇄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

땅굴 공격조(땅굴 쥐들rats teams)들은 장교 또는 팀장에 의해서 지휘되는 6명에서 10명으로 구성됐다. 이들 공격조원들로부터 오는 정보들로부터 지하 땅굴망 개요도를 그려내야 할 책임을 지닌 개별 담당자들이 있다. 땅굴공격조장은 보통 (소음기 없이 권총을 쏘면 고막이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과, 손무전기 또는 스컬 마이크(skull mike)와, 손전등과, 나침판과, 그리고 탐침(probe)을 소지한다. 땅굴 수색에 있어서의 주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교신의 문제이다. (스컬(머리)뒤에 가죽끈으로 묶여진 송신기인) 스컬마이크는 조금 지나면 작동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용처가 드문 그래서 쓸모가 거의 없는 캐나다 제 공경용 와이어를 사용해야 했던 무거운 미 무전기 와이어(줄)는 더 무겁게 했으며 그리고 팀원들을 더 두껍게 만들었다. 신선한 공기의 부족도 깊은 땅굴들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문제였다. 바람을 넣는 공기 컴프레셔인 ‘마이티 미트’(Mighty Mite) 또는 50~100피트 길이의 줄을 보조 헬리곱터 엔진이 땅굴망으로 신선한 공기를 주입하는 데에 자주 사용됐다.

땅굴공격조의 일은 심지어 최상의 조건에서도 어려웠다. 뜨겁고 더러우며 그리고 숨이 차 올랐고, 사방이 얇고 좁은 통로 때문에 자신의 몸을 쭈그려야 했으며, 자신의 등 뒤 땅굴이 무너지지나 않을지 또는 다음을 돌아 가면 앞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고, 그리고 모든 소리에 대해 아드레날린 과다 반응을 해야 했다. 확실히 이 현대 전투 땅굴 수색자는 특수 전투원(special breed)이다.

다음의 것은 대략 라흐 밥(Rach Bap) 남쪽 6킬로미터 지점에 그리고 14번 도로에서 약 600미터 떨어져 위치한 그 삼각지 내 대규모 땅굴 망 수색과 파괴에 관한 기록이다.

(1967년) 1월 21일에 한 베트콩 조력자가 제168 공병대와 접촉하여 지하 (땅굴) 망을 파는 데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제1 공병대 대대 참모진들로부터 순찰대가 조직됐으며 그리고 그 조력자가 여러 공기구멍들과 총구들을 가리켰던 곳인 땅굴 지대로 그에 의해 인도됐다. 그 지역에 대한 계속된 조사는 여러 땅굴 입구들을 지닌 베이스 캠프을 드러나게 했다.

다음 날, 보안군을 주둔시킨 후에 그 땅굴들에 대한 철저한 수색이 처음에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음에도 공병대 땅굴 공격조들에 의해 시작됐다. 그러자 수 백 미터의 부속 땅굴 입구를 드러나게 하면서 숨구멍 하나가 열려졌다. 그 공병대 공격조들은 약 6백미터 가량 그 땅굴 속, 모아진 CS로 나아갔으며 그리고 수색이 중지됐다. 그 땅굴 망에서 발견된 많은 문서들이 제1사단의 G-2로 넘겨졌다. 그 서류들의 평가에 근거하여 G-2는 땅굴 망 수색이 계속되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음 날 공병대 땅굴 공격조들은 화생방전 소대를 대동하고 그 땅굴로 다시 갔다. 800미터 더 땅굴 수색을 한 후에 그들은 뚜껑을 제거하고 부속 방들을 열어서 문서들을 확보했다. 이제 1 킬로미터 넘는 땅굴이 개방 됐다. 더 나아간 수색은 적의 다른 베이스 캠프로 인도하는 하나의 출구를 드러나게 했다.

수색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으며, 점 점 더 많은 문서들이 발견됐으며 그리고 소각됐다. 땅굴 망을 기어 들어 가던 땅굴공격조들은 적의 목소리들을 들었다. 공격조에 의해 던져진 CS 수류탄은 그 땅굴로부터 5명의 베트콩이 몰려 나오도록 했다. 도망가려 했으나 그들은 체포됐다. 지상에서는 이전에 발견됐던 캠프 북쪽 300 미터 지점에서 방어군은 병원 베이스 캠프를 발견했으며, 이 땅굴 망에 대한 수색이 시작됐다.

수색 4일 째인 다음 날 아침 일찍, 땅굴공격조가 예전의 병원 땅굴망으로 돌아 왔다. 다섯 개의 땅굴 막사들이 파헤쳐저서 그라운드로 노출됐고 그래서 그 지붕이 그라운드와 같은 높이로 됐다. 의학책들과 노트들, 소량의 약품들과 그리고 의료 도구들이 300 미터의 방들과 부속 굴들에서 발견됐다. 땅굴공격조들은 베트콩들이 몰려나왔던 제2땅굴 망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땅굴 CS는 더 나아간 수색을 막았다. 제168 공병대로부터의 땅굴 폭파병들이 그날 오후에 도착해서 주야진지에 머물렀다.

1월 26일에 Ceder Fall 작전이 종료됐다. 땅굴폭파팀은 예전의 병원 땅굴 망을 향해 떠났고 수색 팀은 ‘CS 땅굴’ 망으로 돌아 왔다. 재래 폭약과 아세틸렌 장비를 사용하여 그 팀은 연결된 지하 미로에서 더 이상 어떤 정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그 병원 땅굴 망 폭파 준비를 했다. 점심 무렵 그것이 폭발했다. 폭파 후에, 약 200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커다랗게 갈라진 지표면이 보였다. 그런후 그 폭파 팀은 두번째 땅굴 망으로 이동했으며, 그리고 재래 폭약과 아세틸렌을 섞는 방식으로 그것을 폭파시켰다.

발견된 수 많은 지하 땅굴 망 때문에, 소수의 전문 땅굴공격조들이 수색하기에는 땅굴 구멍들이 너무 많았다. 제1공병대들과 다른 부대에서 온 자원병들이 자주 수색과 폭발 임무를 떠 맡았다. 기대된 바와 같이 훈련된, 노련한, 그리고 적절한 장비를 갖춘 대원들이 했을 때의 얻은 결과들은 자원자들이 얻은 것들보다 훨씬 좋았으며 그리고 훨씬 안전했다. 수색하자 마자 그려질 땅굴 지도들이 없을 경우에, 땅굴 파괴 공병대들은 돌아 가서 그 지도를 그려와야 했으므로 힘이 곱절로 더 들었다. 다른 팀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동시에 어떤 한 땅굴 안에 2 개의 팀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한 팀이 다른 팀에게 총을 난사하는 그런 불상사는 생기지는 않았다.

땅굴 파괴하는 새로운 방법이 발전됐으며 그리고 시더 폴(Cedar Fall) 작전 기간에 사용됐다. 그것은 송풍기에 의해 주입된 아세틸렌 가스로 땅굴을 가득채우고 나서 폭약을 점화시켜 그 가스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7 피트(2.1미터) 이상 두께의 덮개를 날려버리면서 땅굴을 파괴시킬 수 있는 탁월한 것은 이 아세틸렌(Acetylene) 밖에는 없다. 재래식 폭파 방법을 아세틸렌과 함께 사용하면 파괴시킬 수 있는 땅굴의 깊이를 더 늘릴 수 있다. 30 파운드 TNT와 그리고 40 파운드의 크레이터(Cratering)가 땅굴 망의 특정한 곳 (동굴들, 땅굴연결지점들, 출구, 그리고 입구)에 장전될 수 있다. 이중으로 장전된 이것들은 일련의 도화선으로 연결되어 전기로 점화된다. 폭발될 때 재래의 폭약들은 아세틸렌 폭발을 위한 보조화약으로 작용했다. 아세틸렌을 함께 사용하는 이러한 고 폭발 실험들은 지하 15피트 ~ 20피트에 이르는 땅굴들을 파괴하는 데에 효과적임이 입증됐다.

시더 폴(Seder Fall) 작전 동안에 제1공병대와 부속부대는 1963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제5군단의 베트콩 문선대에 대부분 속한 문서들과 기록들과 작전계획들의 말 그대로 헬리곱터들에 실을 수 있는 분량을 발견했다. 그 문서들은 베트콩 부대원 규모, 이들 구성원 이름들, 그들의 활동 도시와 마을들의 목록들을 포함했으며, 그들의 몇 몇 회합 장소들을 노출시켰고, 그리고 그 적들이 활동한 방식과 그들의 미래 계획들에 관한 아주 많은 정확한 정보들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급 정도들을 얻어내면서 밀림을 파괴한 것 이외에도 9,445 미터나 되는 적의 땅굴들과, 4 곳의 [[베트콩]] 마을, 27 개의 [[베트콩]] 베이스 켐프, 60 여 개의 자잘한 벙커들, 그리고 다른 부속 군 기지들이 그 공병대들에 의해 파괴됐다. ”  아래 사진(↓)은 철의삼각지 땅굴 망을 보여준다



철의삼각지 땅굴들 대한 대규모 2차 공격인 시더 폴 작전(1967년 1월8~26일)에서 파괴한 장거리 땅굴은 9 km가 넘었다. 그러나 그 9Km는 파괴되지 않는 철의삼각지 내(內) 1,000 여 Km의 단지 백분지일 일 뿐이다. 또 이것들에 이어지는 250 Km의 구찌 땅굴을 더 해 보라. 그리고 이것들을 포함한 월남과 월맹에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30,000 miles (48,000 km) 이상의 장거리 땅굴들(출처 클릭! )을 상상해 보아라. 


비록 땅 위 공중 전투에서는 이겼을지 몰라도 땅 속 지하 땅굴전투에서는 패했기 때문에 미 연합군은 공산군에게 한국전쟁에서는 비기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패했다. 


6.25 당시 지하 땅굴 길이는 전선 250 Km의 두 배인 500 킬로미터였다고 한다(출처 클릭!). 우리는 이 전선들 중 가장 치열했던 삼각고지 지하 20 ~ 30 피트(6미터 ~ 9미터)에 길이 70 야드(yards, 약 65미터), 높이 5피트(약 1.6미터), 폭 4피트(약 1.3미터) 가량의 세 개의 메인 땅굴들에 십 수개의 보조 동굴을 연결시킨 것들을 4 개월에 걸쳐 직접 파고 그 안에서 12일 동안의 땅굴 백병전을 치룬 중공군 중대장의 생생한 증언을 읽었다. 바로 이 철의삼각지 북측 오성산으로부터 남침장거리땅굴 10호선이 시작된다. 장거리땅굴 9호선(철원제2땅굴)은 ‘위장땅굴’(땅굴탐사33년총정리, 이종창신부, 2008년, 222쪽)이다. 10호선과 8호선 등, 장거리땅굴들의 굴착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들켜준 것이 소위 철원제2장땅굴(9호선)이라는 것이다


4) 철의삼각지, 장거리 땅굴 10호선: (목차 클릭!)
철의삼각지 북측 오성산 → 김화, 장수대교 → 철원 동성초등학교(14.5Km, 2008년5월)
철의삼각지 북측 오성산 →, →→→ 철원 고석정 철교(24.5Km, 2008년5월)
철의삼각지 북측 오성산 →, →→→→ 포천 영중초교(46Km, 2013년11월)

장거리땅굴 10호선은 철의삼각지 북측 오성산에서 시작하여 철원 동성초등학교에서 출구를 낸 한 갈래(14.5Km)와, 고석정 철교에서 출구를 낸 다른 갈래(24.5Km)와, 그리고 최근(2013년)에 영중초교에다 출구를 낸 또 다른 갈래(46Km) 등 등, 여러 줄기로 분기되는, 본선의 길이만 46Km에 이른다.:

북측 오성산에서 시작한 땅굴은 철의삼각지 남측 김화읍 장수대교 250도 방향 북위38도15분87.1초, 동경127도30분 47초 지점과 그리고 220도 방향 북위38도14분86.0초 동경127도22분41.1초에서 각 각 두 갈래로 갈라진다. 250도 방향으로 분기하여 전진하는 것은 철원 동송초등학교 GPS 좌표 북위 38도12분20,7초, 동경 127도13분06.8초에 출구 공간 셋을 내며 그리고 마찬가지로 철원 하월곡동 사거리 좌표 북위 38도12분62.9도 동경 127도14분40.8초 지점에 출구를 내는데, 그 총연장은 구 김화에서 14.5Km이다.

그리고 220도 방향으로 갈라져 분기하는 다른 한 갈래 장거리땅굴은 철원 고속정 철교에서 출구를 내는 데, 그것의 GPS좌표는 북위38도11분11.7도와 동경127도18분21.3도이며, 총연장은 24.5Km이다. 아래 사진들(↓)은 229쪽(땅굴탐사33년총정리, 이종창신부, 2008년, 들숨날숨, 서울)과 178쪽 등에서 공개된 남침장거리땅굴 10호선 출구 공간 좌표들과 그 개념도와 땅굴출구위치들이다:









땅굴탐사33년총정리 라는 책을 펴낸 뒤 5년 후인 2013년 11월 이종창 신부는 유투브 참깨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철원 고석정 철교로 이어지는 땅굴 본선의 신 김화에서 와수리 3사단 정문 오는 지선(서면초등학교 운동장에 출구공간 셋을 냄)과 그리고 6사단 바로 앞에서 180도 방향으로 내려 와 5탱크부대(포천시 영북면 운천리)와 15탱크부대(아래 사진 좌측 동그라미쳐진 부분) 지하를 뚫고 휘돌아 통과하면서 포천 영중초교(구 김화에서 46Km), 좌표 북위38도00분88.3초 동경127도14분82.0초 출구 공간 셋을 내는 지선을 설명한다:



다음 좌표들은 이종창 신부에 의해 공개된 5 탱크 부대 안의 땅굴출구 좌표들이다(아래 캡쳐 이미지 참조):

ㄱ) CP장 숙소(연병장 옆): 북위38도05분26.13초 동경127도15분00.30초
ㄴ) :북위38도05분39.0초 동경127도14분99.1초
ㄷ)관사 뒤 8각정 누각 :북위38도05분38.?초 동경127분14초50.?초
ㄹ) :북위38도05분25.21초 동경127도14분59.70초
ㅁ)부대숙소: 북위38도05분38.64초 동경127도14분56.10초




4-1) 군 외부세력에 의한 땅굴은폐 사례(2000년 2월~8월) 1: 5탱크부대 (목차 클릭!)

이러한 땅굴탐사 작업 도중에 이 신부가 발견한 땅굴을 군이 주도하여 덮는 사건이 터지는 데, 그는 이것을 ‘물은 물이요 돌은 돌’ (위 동영상 클립06분46초 부분)인 사건이라 부른다. 시추 해 보니 물하고 돌만 나오는데, 물은 물이고 돌은 돌일 뿐이지 뻥뚫린 땅굴이 어디 있냐 라는 것이다. 이 말을 한 군인은 연합사에서 파견 나온 김 대령이 한 말로서,이것은 현 국방부의 입장(장거리 땅굴 부정)에 직결되므로 세묘할 필요가 있다. 2000년(!) 2월17일부터 8월15일 사이에 5탱크부대(포천시 영북면 운천리)의 숙소 뒷 연병장(하천에 연해 있음)에서 일어난 일이다. 

5탱크부대 그 연병장에서 장거리땅굴 출구(지하 11미터)를 발견한 이종창 신부는 해당 시추 지점 두 군데를 지정 해 줬는데 그 좌표는 다음과 같다(아래 사진들 참조): 1시추구멍(북위38도05분38.35초 동경 127도14분53.13초)--2시추구멍(북위38도05분38.58초 동경127도14분50.79초). 그런데 그 직후부터 8월 15일까지 금족령이 내려져서 이 신부가 땅굴탐사 군부대 현장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땅굴발견 당사자 출입을 막은 후에서 군에서는 3월과 4월 사이에 그 두 구멍을 뚫어 바람이 구멍들에서 쏴~ 올라오는 것을 종이를 입구에 대어 확인 했으나, 그 구멍을 ‘그라우팅’해서 막아버렸다: “이북에서 와서 막아버렸어요”(위 동영상 6분03~05초 부분). 땅굴병이들 와서 그라우팅해서(쇼트쳐서) 막았다는 것이다. 석촌 호수 보조 땅굴에서 주 땅굴로 이어지는 연결 구멍 3미터를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멘트 덩어리 그라우팅해서 덮어 막아버린 것과 똑같은 일이 이미 13년 여 전에 포천시 영북면 운천리 소재 군 부대 땅굴탐사 현장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어째든 이렇게 흔적도 없이 그 두 시추 구멍을 막아버린 후에 군은 이 신부를 동년 8월 15일 이후에 다시 불러서 그 자리에 시추 구멍을 파게 한다. 그러나 막아버린 후라서 그 구멍에서 바람이 올라 올리도 없고 땅굴이 발견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사에서 파견 나온 김대령(해군)이 “ 어디 뻥뚫린 땅굴이 있습니까? 물은 물이고 돌은 돌이지요 “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신부에게 금족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그 두 시추 구멍을 파서 입구에 종이를 댔더니 올라오는 바람에 흔들렸다고 이 신부에게 일러 준 사람은 바로 김대령이라고 증언한다. 시추 구멍을 파서 군이 땅굴출구를 막아버린 것인지, 발견되자 북괴군이 막어버린 것이진, 아니면 군 내 종북세력이 북에게 알려줘서 그걸 막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덮여 막아진 것만은 확실하다고 이 신부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양주 광사동 장거리남침땅굴 출구는 북괴 땅굴병들에 의해 덮혀 막힌 것이지만 13년 여 전 저 포천 땅굴 출구는 해당 군 외부세력인 대한민국 연합사에 의해, 어째든, 덮혀 막혔으며 그리고 당시 연합사 관련 모 장군은 지금 청와대에 들어 가 있다. 그렇다면 북괴땅굴병과 그리고 대한민국 연합사와 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국민 생존과 직결되는 장거리땅굴을 덮어 막고 있다는 점에서는 적어도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 않은가! 아래 캡쳐 사진(위 영상 05분21초 지점)에서 이 신부는 막혀버린 시추구멍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사진 밑 숫자는 위 영상의 타임라인이다:




수 없이 뚤려서 이제는 그 갯 수 조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거리남침땅굴들을 통해서 아군 복장으로 위장한 북괴 특수부대 20 만 여 명이 동시에 청와대 국방부 서울시청 전국 군부대 등으로 한 밤중에 올라 온다면,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4-2) 군 외부세력에 의한 땅굴은폐 사례(2011년8월25일) 2: 15탱크부대 (목차 클릭!)

한탄강 작은 줄기 건너편의 15탱크 부대 입구에서의 땅굴탐사도 5탱크부대에서와 비슷한 결말을 맺게 된다(위 동영상 8분17초~10분19초). 물은 물이요 돌은 돌인데 뻥뚤린 땅굴이 어디있냐는 식의 귀결이었으므로 그렇다. 여기에서도 최종 출구 지점 두 구멍을 시추했는데, 지하 8미터 아래서 그 땅굴로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바로 앞이 한탄강 줄기). 따라서, 그것이 땅굴임을 확인하려면 제1시추 구멍에 물감이나 소금을 풀면 된다. 왜냐하면 두 시추 구멍이 동일한 땅굴로 연이어져 있으므로 제2시추 지점(최종출구)으로 흘러 오게 될 물감 또는 소금 섞인 물을 확인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확인 과정을 군에서는 ‘물은 물이요 돌은 돌이다’고 핑계대면서 하지 않았다. 군이 왜 이러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당시 건강상태가 안 좋았던 이 신부는 한탄한다. 2011년 8월 25일의 일인데, 문제의 그 두 시추 구멍 좌표와 당시 작업 사진은 다음과 같다:

ㄱ) 제1시추구멍 좌표: 북위38도05분37.95초 동경127도15분42?.14초
ㄴ) 제2시추구멍(최종출구) 좌표: 북위38도05분37.06초 동경127도15분40.84초





그러나 철의삼각지대 철원을 지나 오는 남침장거리땅굴은 두 갈래로 분기되는 총연장 46Km의 10호선 뿐만이 아니다. 이 노선 이외에도 철의삼각지역과 관계되는 5개의 노선, 7, 8, 9, 11, 12 호선이 더 있다. 그러나 이종창 신부에 따르면 이 다섯 노선 중 9호선 즉 철원제2땅굴은 북괴놈들이 일부러 들켜 준 ‘가짜’(같은책, 222쪽)이기 때문에 이 글 맨 끝으로 밀어 버리고, 철원 갈현을 지나는 7호선과 철원 중세리를 지나는 8호선을 먼저 살펴 보자.



5) 철의삼각지, 장거리 땅굴 7호선(목차 클릭!)
북측 철의삼각지 → 철원 갈현 → 덕은골 → 웃나무골 → 연천군 군남면 군남초중고(2008년, 17Km)


북측 철의삼각지에서 군사분계선 땅 속을 지나는 남침장거리땅굴 7호선은 우측의 임진강과 나란히 달려, 한탄강 바로 옆의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군남초중교에서 출구공간을 냈는데 그 좌표는 북위38도04분00.9초 동경127도01분02.0초이며, 확인 가능한 것만 2008년 총연장 17Km이다.


6) 철의삼각지, 장거리 땅굴 8호선(목차 클릭!)
북측 철의삼각지 중세리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대광중교 → 경원선 신망리역;
북측 철의삼각지 중세리 → →→ 경원선 연천역.
북측 철의삼각지 중세리 → →→→ 연천군 신흥리 고문동 재인폭포.
북측 철의삼각지 중세리 → →→→→ 연천군 전곡초교
북측 철의삼각지 중세리 → →→→→→ 연천군 천 주유소(2008년 25.5Km)

8호선은 세 개의 출구 공간을 천 주유소까지 남침하면서 측면 네 곳에서 중간 중간 출구들을 낸다. 즉 본 선에서 네 갈래의 가지 노선들이 분기되는 것이다.

이것들 중, 240도 방향으로, 연천군 전곡 초등학교 내(內) 오른 쪽 놀이터로 남침해 온 땅굴의 출구 좌표는 북위38도01분60.2초와 동경127도04분31.5초이다. 관련 이미지 스캔들은 다음과 같다,









7) 철의삼각지, 장거리 땅굴 11호선(목차 클릭!)
철의삼각지 북측 김화 논고개 → 남측 천불산 → 토목동 → 강원도 철원근 근남면 육단리 수피교 다리 앞(2008년 9Km)

철의삼각지 북측 김화 논고개에서 온 11호선은 남측 천불산을 통과하여 대성산 좌측을 뚫고  토목동을 지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수피교 다리 앞, 북위38도13분56.1초와 동경127도29분32.0초 지점에서 각 각 310도, 280도, 250도 방향으로 출구 셋을 낸다. 확인된 것이 2008년 현재 총연장 9Km로 비교적 짧다:







8) 철의삼각지, 남침 장거리땅굴 12호선(목차 클릭!)
북측 철의삼각지 → 분계선 명동, 승암고개 → 원봉산 → 삼청봉 → 대성산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다목초교 → 노동리(사창리) 광덕초교(2008년 32.5Km)

철의삼각지 북괴측 (인근) 어디엔가가 굴착 원점일 남침장거리땅굴 12호선은 분계선의 명동 승암고개 지하를 통과하여, 철원 원봉산에서 195도 방향으로 삼천봉을 통과하여 대성산 좌측 땅 속을 지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다목초교 정문 운동장 오른쪽에서 다목교 우측에 출구들을 둔다. 이 출구의 좌표는 북위 38도10분50.4초, 동경127도32분18.6초이다. “다목리는 표고가 사창리 광덕초교보다 너무 높아서 예상출구를 전술상으로는 내야하니 급경사로 멀리 장재들쪽으로 끌어 올려 낸 듯하다. 이곳의 부대와 대성산 점령이 그 목적인 듯하다. 이곳에서 광덕출구 예상출구까지는 12Km이다. 66m~70m에 등고가 높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설계인 듯하다. 실내초교 좌편에서 대명사쪽으로 출구 낸듯하다”(땅굴탐사33년총정리, 187쪽).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다목초교 정문 운동장 오른쪽에서 다목교 우측에 일차 출구들을 낸 후, 계속195도 방향으로 복주산과 광덕산을 우측으로 지나쳐 사창리(노동리) 광덕초교에서 출구들 셋을 둔다. 2008년 당시 총연장 32.5Km인, 12호선 최종 출구 좌표는 다음과 같다: 북위38도07초69.4초, 동경127도33분8.8초.




12호선을 사진과 개념도(다음 페이지 참조)로 설명하는 곳에서 이종창 신부는 휴전선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읋는다:

“ 휴전선

인간은 마음 맺힌 데가 있으면
이렇게 끔찍한 비극을 낳나 봐.
분계선 표시판 세운 지 32년째
이쪽도 저쪽도 굻은 철조망 높이 치고 고압선 울타리 치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산에서 내려다 보며 살피려고
산마다 벌거숭이 밀고 깎아 내고 또 낸 길들
스무나무살 한창 나이 머스마들과 손에는
무시무시한 화약 무기들이 들려있고
뛰고 달리고 몸놀림 모두를 사람 잘 죽이는 방법 배우고 익히고
그 눈 또 마음의 눈도
총신 가늠대 위를 떠날 줄 모르게 하네. 

왜 이래야 할까?
항상 정다운 저 까마귀 떼들은
이들이 먹다 버린 밥찌꺼기 먹고도
저렇게 한가로이 나뭇가지에 모여 노는데
가끔 마음 내키면 저 북쪽에도 다녀오련만

오직 인간은
한 치도 더 가고 오지 못함이
까마귀만 못하네. ”(위의책, 175∙187~188쪽)


동요같은 맑은 시심(詩心)이다.







이상이 북괴측 철의삼각지 (인근)을 원점으로 한 남침장거리땅굴 6개 노선(7 ~ 12) 중 9호선을 뺀 5개 노선 설명이다. 

이것은 이종창 신부가 파악한 250Km 군사분계선 내 땅굴 17개 노선 중 6 개 노선이 북측 철의삼각지와 그 인근에 원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6.25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철의삼각지를 북괴가 얼마나 중요한 남침 군사요충지역으로 삼고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래(↓) 개념도에서 평강과 철원과 김화로 이어지는 삼각지대를 다른 곳과 유심히 비교해 보라. 둥근 점으로 횡으로 그어진 곡선은 군사분계선이다. 이종창 신부의 이러한 개념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필적할 정도로 주요 지점들을 잘 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철원제2땅굴로 알려진 것은 이종창신부에 의해서 제9호선(0.435 Km)으로 지칭되는, 주변의 다른 장거리 땅굴들에로 향하게 될 시선들을 분산시키면서, 그것을 위장하기 위한 짧고 얕은 땅굴로서, 북괴군이 아군에게 ‘(일부러) 들키게 한 것’(위의책, 222쪽)이다. 이러한 판단은 드러난 17 개 땅굴 전체를 아마 염두에 두고 그 전세(戰勢)를 계산한 결과 생겨난 것일 것이다.





9)철의삼각지, 위장단거리땅굴 9호선(소위 철원제2땅글) (목차 클릭!)
철원제2땅굴(9호선)을 찾은 공로로 1975년 4월 25일에 훈장을 받은 이종창 신부의 그 날일지(위의책, 42 ~ 43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 결어 (목차 클릭!)
이상이 북측 철의삼각지대 땅 속을 시작하여 각 각 비무장지대 지하로 전진하면서 여러 갈래로 분기하여 남침하는 다섯 노선의 장거리 땅굴이었다: 7, 8, 10, 11, 12호선. 그리고 나머지 하나인 9호선 즉 철원 제2땅굴은 북괴놈들이 다섯 장거리땅굴 굴착을 위한 눈속임 용 ‘가짜’(같은책, 222쪽) 땅굴로서, 불과 435미터였다. 0.5Km가 채 안됐던 것이다. 이것 외 땅굴 망들은 최소9Km에서 최대46Km에 이르는 장거리 땅굴들이다(2008년). 
    국내에서 유일한 땅굴탐사 전문가에 의해 확인된 부분만 이 정도이니, 그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부분과 그 이후 북괴에 의해 계속 굴착되고 있는 것까지 더하면 남침장거리땅굴 총 연장은 아마 긴 것은 수 백Km까지 이어졌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땅굴 전문 탐사자들에 의해서 이미 부산과 목포까지 장거리남침땅굴이 확인되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장거리 땅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단지 20여개의 아주 잛은 땅굴들 만이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기존에 발견된 (위장) 땅굴들과 나란히, 묻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인, 더구나 그 위치조차 현재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국방부를 믿었다가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채 북괴에 갖다바칠 판이다. 바로 이것을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 실장등 곳 곳의 요직에 또아리 틀고 앉아있는 종북좌파세력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 길은 이들 종북좌파북 세력 암세포들인 김관진 청와대실장과 한민구 국방부장관과 박지원의원 등의 정치생명을 끝장내므로서, 

국방부로 하여금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해 주는 것 밖에 없다! 
(마지막 줄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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