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의 범죄
잔인한 자를 동정하고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
趙甲濟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3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귀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설교하신 유명한 산상수훈중의 또 유명한 귀절입니다. 여기서 '그의 나라'는 영어 성경에서는 His Kingdom, 즉 하나님의 나라로 적혀 있습니다. 구하라는 말은 구출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추구한다는 뜻, 찾는다는 뜻인 Seek로 되어 있습니다. 義는 正義라는 의미인 righteousness로 적혀 있습니다. 이 正義는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His righteousness, 즉 하나님의 正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찾으면 너희들이 갈구하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正義가 바로 서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에 나오는 그의 義, 즉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은 고통당하는 인간들, 죄 지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정의로움, 즉 인간해방과 인간구원이 가능하려면 먼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가 번성하는 나라이고 기독교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꽃피는 나라일 것입니다.
로마서 14장17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안에서 義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正義 있는 평화 속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평화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그 평화는 독재자의 평화가 될 뿐입니다. 반대로 正義만 있고 평화가 없다면 살벌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정의, 평화, 행복이 성령 가운데서 조화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李承晩과 김일성의 기독교 체험
그런 나라를 이 땅에 세우겠다는 일념을 가진 분이 바로 134년 전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분이 바로 건국의 아버지인 李承晩 초대 대통령이십니다.
뒤에는 무지막지한 민족반역자와 기독교인 학살자가 되었지만 북한의 수령 金日成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미국의 기독교 단체가 만든 미션 스쿨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반석이란 이름도 성경(베드로가 盤石이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강반석은 고향인 칠골교회의 집사로 봉직했습니다. 金日成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일학교에서 金日成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성경을 가르치고, 그의 육촌동생 강양욱은 소년 金日成의 주일학교 담당 교사였다고 합니다.
북한 정권을, 주체사상이란 종교를 믿는 사교 광신집단으로 해석하여 신도수 기준 세계 제10위의 종교단체로 올리는 통계도 있습니다. 김일성을 聖父, 金正日을 聖子, 주체사상을 聖靈, 10계명을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일성이가 주체교리로써 북한주민들을 속이고 노예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의식과 형식을 많이 참고로 했다는 뜻입니다.
초대 대통령 李承晩 박사는 원래 전주 李씨 양녕대군(태종의 長子로서 세종대왕에게 王位를 양보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끈질기게 과거 시험에 도전했으나 낙방을 거듭한 사람이었습니다. 李承晩이, 갑오경장으로 과거 시험이 없어지자 좌절해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배재학당에 나가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李承晩이 守舊세력에서 급진 개화세력으로 바뀌는 매개 역할을 기독교가 수행한 것입니다.
남북한의 두 지도자의 기독교적 공통점은 여기서 끝납니다. 김일성은 만주로 가서 공산주의와 만나고 李承晩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가서 자유민주주의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에서 명문 대학을 나오고 지도층 인사들과 대등하게 교제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약관의 나이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 독립의 문제를 놓고 담판했고,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생 시절에는 미래의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 총장의 총애를 받고 친밀하게 交遊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통합한 바탕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투시하고 대한민국 建國의 날을 내다보면서 그 미래를 설계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문명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지 않은 무서운 자주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됨으로써 한민족의 모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미국 젊은이들의 피로써 해방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은 20만 명이 넘는 戰死者를 내는 희생을 치른 끝에 日帝를 무찌르고 한민족을 해방시켰습니다. 미국의 승리는 또한 이승만의 승리이기도 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이승만 김일성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귀국했습니다. 김일성은 증오의 과학(공산주의)으로 무장한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李承晩은 사랑과 생명의 종교(기독교)에 바탕을 둔 人權과 자유의 이념(자유민주주의)을 신념화한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李承晩 박사는 한국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의 속삭임에 넘어가던 1920년대부터 벌써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하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이렇게 빨리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독교인의 머리와 그리스도의 눈으로써 공산주의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덕분일 것입니다.
이러한 李박사는 건국할 때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사상에 기반을 둔 민주국가로 만들려는 꿈을 지녔습니다. 반면 스탈린식 최악의 공산주의에 혼을 판 김일성은 인간생명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唯物사상에 젖어서, 外勢를 끌어들여 同族을 치는 민족반역의 남침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기도로 시작된 나라
1948년 5월31일 制憲 국회 제1차 회의, 즉 開院式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독실한 기독교 신자 李承晩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建國된 것은 자신들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 군대가 북한을 해방시켜준 것을 말하지 않고 김일성의 抗日유격대가 북한으로 진공하여 해방되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李承晩의 겸손과 김일성의 오만과 날조가 대조적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서는 스탈린이 써주는 시나리오대로 김일성이 서양 사상사의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낸 사회주의를 교리로 삼고 狂信과 증오와 분열과 거짓선동의 범죄단체를 만들어 여기에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간판을 달았습니다. 북한의 헌법과 국호는 북한사람들의 참여 없이 스탈린과 소련 정치국이 만들어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단어처럼 많은 거짓과 사기성을 담고 있는 단어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은 그 본질상 민주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 독재이며, 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수령이 지배하는 범죄단체 또는 마적단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잘 아는 일본 공산당원 하기와라 료씨는 “권력을 세습하는 김일성 김정일이야말로 세계 공산주의의 진정한 적이다”라고까지 말하겠습니까.
李承晩은 미국을 설득하고 때로는 맞서기도 하면서 건국을 주도하였고, 같은 시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면접-필기시험에 합격하여 지도자로 선택되었습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북한의 건국을 주도하면서,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증오와 선동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독재 체제의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반도는 두 개의 이념, 두 개의 종교 대결 시대로 들어간 것입니다. 공산주의 對 자유민주주의, 주체광신교 對 기독교, 즉 증오와 사랑, 거짓과 진실의 대결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현대사의 主流가 기독교
지금 많은 한국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김일성 김정일을 '사탄의 세력'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父子가 하나님을 僭稱(참칭)하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김일성 김정일은 인간이 가진 善惡 兩面중에서 惡의 성질을 자극하여 인간을 凶器로 만들었습니다. 흉기로 돌변한 인간들이 이 강토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서양처럼 同族학살의 전통이 없었던 한국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고 죽이는 同族相殘의 피비린내가 공산주의가 퍼지는 곳마다 풍기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힘을 빌려 주일 새벽에 동족을 치는 6.25 남침전쟁을 도발하여 약300만 명의 人命을 희생시켰고, 그의 아들은 장기집권의 편의를 위하여 개혁 개방을 거부함으로써 약300만 명의 주민을 사실상 굶겨죽이고도 호화와 사치를 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00만 명은 유태인 수용소보다 더 지독한 강제수용소에서 사라졌습니다. 父子가 합쳐서 700만 명의 지구보다도 더 무겁다는 인간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이 사탄의 세력에 魂을 판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거짓 선지자가 되어 남한에서 국가를 분열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악용하여 파괴의 논리를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요를 누리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敵그리스도에게 바친 채 대한민국을 멸망으로 몰고 가려 합니다.
김일성 김정일 父子의 惡行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健在하고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덕분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지난 100여 년간 한국의 역사 속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의 기적, 그 주체세력은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1. 기독교는 開化의 主役이었습니다: 주로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개신교가 선교와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하여 한국인들과 손잡았습니다.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韓美 우호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李承晩이란 기독교 민주주의적 지도자가 탄생했습니다.
2. 기독교는 독립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3.1 독립선언문 서명자 33명중 16명이 기독교도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日帝의 우상숭배 강요에 반대했고 순교함으로써 암흑시기에도 기독교 정신의 불씨를 지켜냈습니다.
3. 기독교는 建國의 主體세력이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 반공정신, 자유민주주의의 터전 위에 세웠습니다. 制憲국회 개회식은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4. 기독교는 反共의 중심이었습니다: 북한 무신론 정권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교인들을 남쪽으로 추방한 뒤 괴뢰 정권을 세웠으나 기독교는 남한에서 강력한 반공민주의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5. 기독교는 護國의 보루였습니다: 6.25 때 한국을 지킨 핵심 세력은 기독교적 민주주의로 무장한 서방의 자유진영이었고, 북한 출신 기독교 장교단이었습니다.
6. 기독교는 근대화의 생활철학을 제공했습니다: 기독교 정신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좋은 곳에 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가르쳤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16~17세기 유럽에서 칼빈주의가 그러했던 것처럼 근대화 시기에 필요한 자본주의의 직업 노동 윤리를 제공한 것입니다. 위선적인 淸貧사상이 아닌 기독교적이고 적극적인 淸富사상이 근대화 시기 한국인들을 부지런히 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淸貧사상은 가난한 것이 善이라고 가르쳤지만 淸富사상은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욱 善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7. 한국의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기독교 정신의 자유, 평등, 인권 사상은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된 민주화의 논리적 바탕이 되었고 교회는 민주화의 중심이며 민주화 운동가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8.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기독교는 다가오는 자유통일의 시기에는 십자가 軍兵이 될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인 김정일 정권을 無力化시키고 북한주민들을 구출하여 북한을 민주화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자유화하는 역사적 임무를 기독교가 맡고 있습니다.
9. 한국의 기독교는 一流국가와 一流시민을 양성하는 정신적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빌라도식 방관의 죄
한국 기독교의 이런 역사적 사명과 역할은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찬들에게 하나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임이 분명한 김정일 정권과 그 추종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을 僭稱하는 김정일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탄의 유혹이 기독교내부에까지도 번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김정일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북한동포를 외면하고 대한민국을 敵으로 돌리는 것이며, 사탄과 친구가 되어 하나님과 敵對하겠다는 것입니다. 김정일과 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또한 한민족의 해방자였고 대한민국의 구원자였던 미국과 원수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김정일을 싫어하지만 그와 싸울 필요는 없고 그냥 이웃처럼 지내자는 평화공존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수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지 않는 크리스찬은 크리스찬이 아니라 빌라도입니다.
우리가 매일 읽는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서기 352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교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聖靈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全能하신 하나님 右便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여기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명시한 것이 중요합니다. 영어原文은 '본디오 빌라도의 治下에서 고난을 받으사'로 되어 있는데 우리 말 번역과정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로 단순화되는 바람에 빌라도에게 직접 예수님 처형의 책임을 지우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여러 번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참고한다면 사도신경의 이 問責은 너무 가혹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예수님의 生殺여탈권을 쥔 사람은 유태인들이 아니라 로마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유태인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만한 용기만 있었다면 예수님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중선동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良識을 갖고 있었으나 그 良識은 신념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살인자로 빌라도를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12절을 읽겠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었다가는 자신이 로마 황제에 반역하는 자를 도운 것으로 될까봐 예수를 처형하기로 합니다. 유대인들의 선동에 굴복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범한 죄과는 '방관의 죄'라고 불립니다. 방관하지 않고 행동했다면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힘센 자가 비겁하여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기독교는 가장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예배 때마다 이 사실을 想起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罪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와 교인들은 빌라도와 같은 '방관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예수님처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핍박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지척에 있는 북한동족들입니다. 한국의 1000만 기독교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면 김정일 정권을 약화시키든지 밀어내고 북한동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主流層이 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할 만한 힘과 돈과 머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세력은 빌라도처럼 한국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권력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김정일 독재자로부터 맞아죽고 굶어 죽어가는 북한동족들을 구원할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독재자 김정일의 '악마의 飽食(포식)'을 계속해서 방관한다면 기독교인들이 수백만 동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책임을 빌라도처럼 져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한국 기독교의 비겁이 김정일의 살육과 같은 무게로 계산될지도 모릅니다. 한국 기독교가, 富者들과 성공한 사람들의 무사태평을 기원해주는 역할에 주력하면서 하나님을 참칭하는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이 '사탄의 세력'에 의한 동족학살엔 눈을 감아버린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 한국 기독교인들이 외면하고 있는 것은 북한동포의 모습을 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막강한 권세와 돈과 숫자를 갖고도 피 흘리시는, 굶주리시는 예수님을 모른 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의 탈무드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잔인하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김정일을 동정함으로써 북한 동포들에게 잔인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스스로의 얼굴을 성경의 거울에 비쳐봐야 할 것입니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의 의미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1995년에서 1999년 사이 우리와 똑 같은 말을 하고 똑 같은 역사를 공유한 동포 300만 명이 조용히 굶어 죽어갔다는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30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5년간 매일 2000명씩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 300만 명의 떼죽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떼죽음을 몰고 온 大饑饉은 북한주민들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인민의 굶주림은 전적으로 黨의 책임입니다.
둘째, 김정일은 구제수단이 있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무기구입비를 줄이면 식량을 수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스위스 은행에 맡겨놓은 50억 달러의 비자금중 매년 수억 달러만 식량구입에 썼더라면 떼죽음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집단농장을 중국식으로 개혁하여 개인 경작을 허용했더라면 떼죽음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시체를 위한 금수산궁전 건축비를 줄이고 김정일과 그 지배층의 호화판 생활비를 줄였더라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북한주민들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항의시위 한 번 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김정일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그의 만수무강을 빌었다고 합니다.
넷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대기근 속에서도 김정일의 식탁은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이 내어놓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술과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덮였습니다. 日本食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라는 일본인은 12년간 김정일 곁에서 요리를 했는데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야 북한에서 대기근과 떼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김정일과 그 측근들은 인민들이 사는 지옥 속에 간부들이 사는 천국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니 그 천국의 일원이던 요리사가 주민들의 굶주림을 몰랐던 것입니다.
다섯째, 북한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동안 대다수 남한 사람들과 정치인들은 이를 방관하였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수십만 명에 이르는 탈북자들에게도 연장되었습니다. 한국의 언론은 북한의 진실을 전하지 않고, 한국의 정권은 북한정권의 책임을 따지지 않으며, 상당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북한주민이 아닌 김정일 정권을 돕고 있습니다. 북한 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없으니 김정일에 대한 분노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거꾸로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없으니 북한 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기독교가 북한에 보내는 金品의 거의 전부는 김정일 정권의 간부들에게 전해져 이미 나온 배를 더욱 불리고 있습니다.
지금 남한의 보수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다수 기독교인들까지도 赤化통일뿐 아닐 자유통일을 두려워합니다. 통일에 따른 비용부담을 겁내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사람들이 몰려와서 집 앞에서 거지떼처럼 행세할까 봐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통일은 명분도 구호도 아닙니다. 그것은 절실한 인간구출의 문제입니다. 민족의 반쪽은 노예이고 다른 반쪽은 자유민인 상태가 오래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自由民까지 노예가 되든지 노예가 해방되어 自由民이 되든지 兩者擇一입니다. 자유통일의 핵심은 북한의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흑인노예보다 더 못사는 북한의 동족노예들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한국이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평화공존으로 위장한 비겁과 방관의 길을 걷는다면,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런 방관의 죄를 범한다면 사도신경에 빌라도 대신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름이 들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 2011-07-14, 17:58 ] 조회수 : 2146
출처: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39350&c_cc=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