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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10.10.30 06:22

해방 정국과 기독교 건국 운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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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과 기독교 건국 운동(상)

1. 서론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9일 독일이 해체되고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의 요구대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드디어 끝났다. 이로써 중일·태평양전쟁이 종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이 마침내 해방되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것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조선인민공화국도 조직되었다. 미군이 진주한 후 우파 정치세력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송진우, 김성수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국민주당이었다. 이즈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도 차례로 귀국하였다. 미국에서 외교노선의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은 10월 16일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11월과 12월에 귀국하였다.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자 남한의 우익 간에 균열이 생겼다. 1945년 말부터는 신탁통치 반대 노선을 앞세운 우익 세력과 신탁통치 찬성 노선을 내세운 좌익 세력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은 모두 우익의 반탁운동 진영에 합류했으며 교회 지도자들도 반탁운동에 참여했으나 이승만 지지 세력과 임정 지지 세력으로 나뉘었다.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1946. 3-5, 1947. 5-7)와 그 중간 기간에는 미군정의 후원 아래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고, 이것에 대한 찬반이 기존의 반탁-찬탁 운동과 중첩되었다. 1947년 7월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된 이후에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이 급속도로 힘을 얻어가는 가운데, 유엔이 남한만의 총선거 방침을 결정한 1948년 2월 이후 단정 노선과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이처럼 다양한 정치집단들과 세력들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임정요인들이 환국한 1945년 11월 이후 임시정부 지지 입장을 밝히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나갔다. 여기에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나라를 다시 세우는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는 소명의식도 작용했다. 예컨대, 1947년의 한 설교에서 한경직은 “해방된 오늘날 나라를 다시 찾아 나라의 주인공이 된 우리로서는 누구나 다 정치에 관여하여 국가의 흥륭을 기대하는 것이다”1)라고 했다.

이런 입장은 조선민주주의임시위원회 서기장이 된 평양신학교 출신의 강양욱 목사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1947년 여름 북한에서 취재 활동을 벌이고 있던 안나 루이스 스트롱에게 일제 치하에서 종교와 정치는 전혀 별개여야 했으나 이제는 “민주국가의 모든 시민과 조직은 좋은 법안의 통과를 추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남한과 북한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던 두 사람은 지향하는 정치체제는 크게 달랐으나 국가재건의 과업에 교회가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었다. 한경직 목사와 강양욱 목사에게서 볼 수 있는 종교와 정치의 불가분리 관계 및 교회의 국가재건 참여에 대한 관심은 설교나 강연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조직된 기독교단체의 강령을 통해 나타났다.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1945. 8), 기독교신민회(1945. 12),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1945. 12), 기독교민주동맹(1947. 12), 그리스도교연맹(1947. 7)은 이 때 조직된 단체들로 모두 교회재건과 함께 국가재건을 위한 활동을 내세우고 있었다.3)

이 시기에 기독교의 건국운동은 세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 노선을 따르는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중심의 중도파(김구, 김규식 지지 노선),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공산주의 지지 노선), 그리고 대다수의 기독교단체가 참여한 우파(이승만 지지 노선)가 그것이다. 세 노선은 신탁통치, 좌우합작,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태도와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구분되는데, 이 노선들 중에서 한국 교회 대다수가 추종하던 노선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파 노선이었다.

이 글은 해방 정국에서 형성된 한국 교회의 세 노선을 분류하고 특히 교회 내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 노선이 제시한 기독교 입국론을 분석한다.4)

2. 기독교 우파의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로부터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전해졌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 3국 외무장관 회담, 즉 모스크바 3상회의(1945. 12. 16-26)의 골자는 우선 민주적 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며, 이 위원회는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한국에 대한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의 5년간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 초안을 작성, 이를 4개국 정부의 심의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남한의 정치 상황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교회의 충격적인 반응도 조선기독교남부대회의 기관지 〈기독교공보〉 창간호에 조선기독교남부대회장 김관식 목사의 이름으로 즉시 나타났다. “이 소식을 들은 12월 28일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고 길 가던 사람의 발길이 멈추어지고 웃던 사람의 얼골이 창백해진 신탁통치라는 말을 드른[들은] 무서운 날이다.”5) 임시정부, 한국민주당,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의 우파 정치세력은 즉각 반발하면서 반탁을 결의하였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의 좌파도 처음에는 반탁에 동조했으나 곧 입장을 바꾸어 신탁을 지지하였다.

반탁-찬탁 국면에서 개신교 교회는 명백히 반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기독교 우파 세력이 증대되는 반면 좌파 세력은 축소되었으며 중도파 역시 그 입지가 극소화되었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 입장이 가장 먼저 표명된 것은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였다. 해방이 되자 기독교계에도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조직이 필요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나타난 것이 해방 후 최초의 교회 조직인 남부대회(南部大會)였다.6) 남부대회의 역사적 연원은 1945년 7월에 결성된 일본기독교조선교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강력한 종교통합 정책에 의하여 조직된 이 단체는 중앙조직을 먼저 결성하고 지방조직을 정비하던 중 8·15를 맞았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장로교와 감리교, 구세군 등 개신교 교회들의 통폐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해방을 맞이한 시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던 교회 조직이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임원들은 해방 후 이 조직을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

통합된 교단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왕에 교파를 초월한 단일 교단이 이루어진 만큼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이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건국의 주도권을 가진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건국 이념을 제공하며 그들을 적극 후원하기 위해서는 초교파적 단일 교회로 단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다.7)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간판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꾼 뒤 1945년 11월 27-30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38선으로 인하여 남한 교회들만 참석했는데, 이것이 제1차 남부대회였다.8) 개신교 주요 교파들이 참석한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는 조선독립촉성을 위하여 3일간의 금식 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절대 지지, 38도선 문제와 조선을 완전 자주 독립시키기 위하여 미국 교인의 여론 환기 및 트루먼 대통령께 진정하는 일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전국 교회에서는 이듬해 1월 1일부터 3일간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금식기도가 열렸다.

해방의 감격 속에 이처럼 교회 조직이 재건되고 있었지만, 1945년 11월 23일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까지 교계 차원의 조직적인 건국운동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해방 후 자주 독립국가 건설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 지도자, 특히 평신도들은 기독교계보다는 거국적 차원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한민당·국민당을 비롯한 정당·사회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남부대회를 계기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두 개의 단체, 기독교신민회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가 탄생했다. 두 단체 모두 반탁 입장을 표방했음은 물론이다.9) 임정 요인들의 환국에 앞서 이승만이 귀국하여(1945. 10. 16), 10월 23일 50여 개 정당·사회단체를 망라하는 대표기구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가 발기된 후, 11월 말에 발족된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는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촉성”하고, “단결을 견고히 하여 민족 통일을 기”한다는 강령을 만들고, 임원진은 회장 함태영, 부회장 박용희, 김영주, 총무 김종대 등으로 구성하였다.10) 12월에는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취지로 교회 지도자들은 천주교·유교·천도교·대종교 등 다른 종교단체와 함께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남부대회 직후 1945년 12월 1일 출범한 기독교신민회는 기독교가 전개할 민족사회운동을 전 조선이 절실히 기대하고 있다면서 신구교회를 망라하며 대동단결로써 일대 구국운동에 참가할 것을 선언하였다. 기독교신민회는 회장 박용희 목사를 비롯해 최동·박용래 등 앞서 사회민주당을 결성한 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후 기독신민회는 조직국장 유재기 목사를 중심으로 생활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창립하고 지방에 지부를 조직했다. 기독신민회의 회원 수는 1946년 6월 현재 3,650명이었다.11) 기독신민회는 창립 이후 제반사업을 뜻한 대로 진척시키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1946년 9월에는 “기독신민회에 대하여 동지제위께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실천해야 할 사업을 밝혔다. 이 성명은 그리스도인의 대동공동체, 파쟁의 부인, 염세사상의 청산, 계몽운동, 국민보건운동, 농촌봉사, 기독교 경제 윤리운동, 정치훈련 등 8가지 활동 방향을 밝혔다.12) 이것은 “그리스도애의 사회적 구현, 십자가의 건국이념에의 반영 구현”을 위한 실천사업을 제시한 것이었다.

박용희는 국민당 부위원장이기도 했는데, 국민당이 1946년 4월 한독당과 합당하자 기독신민회는 김구와 한독당의 기독교계 지지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용희, 김수철, 신창균, 유재기 등 기독교신민회 간부 중 일부는 한독당에 참여하고 있었다. 남북협상 이후 김구와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제2차 남북협상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기구로 통일독립촉진회를 발족하자 기독신민회도 참여했다.13)

친이승만 계열의 교계 지도자로는 배은희·함태영·이규갑·이윤영 등이 있었다. 1946년 6월 3일 이른바 정읍 발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구상을 밝힌 이승만은 우익 최대의 대중조직인 독립촉성국민회의 기반 조직을 장악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 한민당과 함께 자율정부 수립운동-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어서 그는 12월 미국에 가서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과 남조선과도정부(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한 뒤, 1947년 7월 한국 민족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남한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본격화했다. 이때 장로교 목사 배은희는 한국 민족대표자 대회 회장을 맡아 이승만의 단정 노선을 관철하는 데 앞장섰으며, 정부수립 초기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국내에 별다른 지지기반이 없었던 이승만은 기독교 세력을 중시했는데, 1947년 7월 출범한 그리스도교연맹도 그런 선상에 있는 조직이었다. 그리스도교연맹은 위원장 함태영과 남상철·김활란·배은희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는데, 김구를 지지했던 천주교 측의 남상철을 제외하고 모두 이승만 지지자였다. 이 연맹은 교도로서의 국가적 진로를 확립하고 전 민족적 통일과 자주독립에 기여하기 위해 강령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총집결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봉사함,” “기독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승등적 평형을 위하여 봉사함,” “세계 형제주의로서 국제친선과 평화를 위하여 봉사함”을 내세웠다.14)

3. 좌우합작 및 남북협상론을 따르는 중간파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는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의 5년간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초안을 마련해야 했으나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자 미 군정은 온건한 중간파 세력으로서 김규식, 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좌우합작운동 찬반 국면에서 개신교의 압도적 다수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반대 진영으로 합류했다. 이 시기에 좌우합작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개신교 단체는 김규식이 회장이던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기청)가 유일했다. 이 연합회는 해방이 되자마자 성결교의 윤판석·전피득, 장로교의 김태범·안병욱·홍권, 감리교의 김희운·맹기영·윤원호 등이 기독교청년운동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1945년 8월 19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직된 것이었다. 원래 조선기독청년연맹이라는 명칭으로 결성되었으나 1945년 11월 26일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는 성명서에서 “하느님의 교회에 절대 봉사하며 조선의 완전독립과 건설에 헌신”하려는 일념에서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창립총회를 소집했다면서 “신의 은총과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강력한 통일교회의 건설”과 “조국을 참된 축복의 땅으로 아름다운 민주주의에[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였다. 성명은 또 “대한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의 공적을 울어러[우러러]보고 환희로 맞으며 이를 절대 지지한다”고 천명하였다.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는 12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의 결성에 참여했다.15) 기청연합회의 회장에는 김규식이 추대되었고, 엄요섭·조향록·이강훈·김희운·강원룡·이일선·최영휘·이규석·정달빈 등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의 청년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상당한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 회장에 김규식이 추대된 데서도 살필 수 있듯이,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는 1946년 6월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될 때 김규식의 지지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는 1947년 1월 우익 단체들이 미소공동위원회 협의 참여를 취소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미소공동위원회 참여 방침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3월 미소공동위원회와의 협의 문제를 놓고 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 간부들은 분열되었고, 결국 김규식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청년회전국연합회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불참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직후 극우적인 청년·학생단체들과 협력하여 강력한 반탁운동에 돌입했다.16)
1947년 2월 2일 영락교회에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초교파적으로 열린 독립기원기독신도대회는 이런 교회의 반탁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는 “모스크바 삼상 결정 중 신탁통치 조항은 완전독립의 연기를 의미하므로 차를 절대 배격”할 것을 선언하였다.17)

교회 여론은 이미 1946년 6월부터 단정 노선을 밝힌 이승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 노선을 지지하는 기독교의 중도파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이 일로 교회 내의 우파와 중도파는 대립했으나 중도파는 지도자들의 암살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18) 1947년부터 동서간의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 역시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꾸었고, 그에 따라 미 군정도 좌우합작운동의 지원을 계속하기 어려웠다. 이 무렵부터 교회에서도 좌우합작 지지 세력에 대한 제재가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에 열린 조선기독교회청년회전국연합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김규식 장로 대신 김춘배 목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일선 정치인을 교회청년회의 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좌우합작의 주동인물을 교회청년운동의 수반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는 주장과도 연관된 것이었다.19) 그 후 1949년 4월 5일에 열린 제3회 전국대회에서는 조선기독교회청년회전국연합회의 지나친 정치성이 지적되어 조직을 해체하기로 했다.20) 그후 4월 17일 장로회청년회 전국연합회 주최로 남산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전야 촛불예배에서 김규식이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가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21) 또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의 우파 대표로 참여했던 강원용은 그로 인해 소속 노회에 의해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 내에서 좌우합작 주장은 금기에 가까웠다.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고자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이번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그 해 11월 유엔은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에 왔으나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는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엔은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남한 내의 정치쟁점도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성과 반대에서 단독정부(단정) 수립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바뀌었다. 단정 문제로 쟁점이 바뀌어 가면서 우파는 분열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단정 수립에 찬성했으나 일부 임시정부 세력은 중도파와 결합해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에 나섰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단독 선거를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단정과 남북협상 노선의 갈등 국면에서 교회는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정 노선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중도파나 좌파의 교회 내 입지는 거의 없어졌으며, 그에 따라 남북협상에 나선 김규식·김구와 교회의 거리도 더욱 멀어졌다.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1948년 4월의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참여로 현실화된 남북협상 노선은 종전의 좌우합작 노선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남북협상의 의의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장차 남북 분단이 가져올 민족적 비극을 내다볼 수 없었다.

결국 해방 정국에서 교회는 반탁 및 단정 노선을 굳건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보더라도, 해방 정국에서 기독교의 일관된 우파 성향은 확실히 돋보였다. 종단 내 좌파나 중도파의 세력이 강했던 불교와 천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우파 성향 면에서 개신교와 가장 가까웠던 천주교조차 1947년 9월경까지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그 이후에야 비로소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22)

김 흥 수 (목원대학교 한국교회사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전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회장

출처: 기독교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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